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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08. 2021

과거는 과거일 뿐,미래를 보자

오늘도 어김없이 햇살은 산을 넘어오고 산들바람은 봄의 초록을 짙게 합니다. 허둥지둥 샤워를 하고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할 새도 없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어제 입던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전철역으로 내 쳐 걸어 만원으로 들어찬 객실로 들어섭니다.


승객들이 다닥다닥 서있는 전철 안이 조용합니다. 마스크가 입을 막고 있나? 객실 칸 승객의 대부분은 휴대폰에 눈을 두고 있고 그나마 좌석에 자리 잡고 앉은 사람 몇몇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지난밤 서울 및 부산 시장 선거가 있었으니 시끌벅적할 것도 같은데 조용하다 못해 분위기가 싸합니다. 출근하여 직장동료들을 만나면 선거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다들 예상하고 있었을 테고 또 그렇게 되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범인들의 일상에서 선거는 무한대로 벌어지는 확률 중 하나로 지나가는 사건의 하나일 뿐입니다. 국가적 사건도 아니고 서울과 부산에서 벌어지는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이 사건이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긴 하지만 강남에 아파트를 하나 더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사는데 신경 쓸 일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천지개벽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정치권의 파렴치와 위선에 넌덜머리가 난 영향이 클 겁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오감에 다가오는 자연의 감각은 어제와 동일함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얽매어 사는 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과거가 현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 압제기가 그렇고 공산당 빨갱이가 그렇고 천안함과 세월호가 그렇습니다. 적폐를 청산해야 바로 선다는 확신에 차있습니다. 모든 것이 과거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물론 과거는 현재의 방향을 정하는 키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복합적으로 움직이는 유기체입니다. 어느 쪽에 더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과거에 얽매어서는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를 들먹이는 이유는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지나온 길이기에 나름대로 감성을 입혀 감정을 이입할 수 있기에 온갖 수사를 가져다 붙입니다. 과거는 감성팔이 소재의 전형으로 둔갑을 합니다.

공동체 사회는 다양성을 기본적으로 인정을 해야 굴러갈 수 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다양성 존중하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가라앉을 거라고, 어느 세월에 모든 사람의 입장을 들어줄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에 의해 소수의견은 무시하더라도 대중의 의견에 따라 빨리빨리 일을 진행해야 사회가 돌아갈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양성 수용의 정도가 사회의 수준을 정의하는 것도 맞습니다. 얼마나 그 사회가 다양성을 포용하기 위해 토론하고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합일에 이르기까지 고민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법과 제도가 시행되어도 수긍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토론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상대의 의견에 말꼬투리를 잡고 목소리 높여 비난의견을 내야 지식인양 평가를 받습니다. 저급 문화의 표본입니다.  TV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치고받고 말싸움을 해야 토론이 재미있다고 평가합니다. 우리 사회는 토론을 재미로 하는 불구경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과거를 놓고 논의할 것이 아니고 미래를 놓고 논의해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분석해야 미래의 방향을 알 수 있지만 지난 일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데 더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토론을 하면 생각이 다르다는 비판 의견은 나올지언정 비난 의견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미래에 대해 아는 체를 할 수 있지만 그 허세는 금방 탄로 날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대화가 신중해집니다. 서로 모르기 때문에 좀 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전망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됩니다. 세상을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모순을 안고 살아가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의 시선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야 아픔을 인정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공동의 해결책과 합의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사회가 굴러간다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힘겹게 겨우 겨우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설 수 도 있고 심지어 뒤로 굴러갈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멈출지언정 뒤로 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야 미래가 겨우 보일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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