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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07. 2021

'나'에 대해 나보다 '주변 사람'이 더 잘 아는 이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화성 탐사 로버 퍼서비어런스(Perseverance)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넘어 화성의 지표 사진을 실시간 전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의 속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매일 올려다보는 달에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1969년 이래 달에 다녀온 사람도 10여 명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겉 표면임에도 물로 덮여 있다는 이유로 가장 깊은 심해라고 하는 마리아나 해구 11,034미터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3명인가 밖에 안됩니다. 그중에 한 명이 영화 아바타 제작자로 유명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2012년 내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꼭 인간의 마음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을 더 잘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말입니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본인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지?"라고 되돌아보면 갑자기 말문이 막힙니다. 나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정의를 내려본 적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정의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더 명쾌한 답변을 들려줍니다.


나는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처리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학습되어왔고 그렇게 해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으며 또 그러했기에 지금까지 잘 버티고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소의 행동과 생각에 의심을 갖고 되물을 때는 무언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고 막힐 때입니다. 운동을 했는데 팔다리가 아플 때입니다. 일을 처리했는데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정말 평범하게도 우리가 사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마주할 때 되묻게 됩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 모습이 본인과 다르기에 유심히 관찰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입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보다 나를 훨씬 잘 알게 됩니다. "너는 조금 소심하지만 마음은 따뜻해. 잘 챙겨주잖아" "넌 정말 낙천적이야 세상을 밝게 보잖아. 니 옆에 있으면 힘이 생겨" "넌 정말 멋쟁이야. 감각이 있어. 옷도 잘 입고 핏이 살아있잖아. 대단해" "넌 너무 이기적인 거 같아. 항상 혼자 이해득실을 따지잖아" 뭐 등등의 표현으로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뭔 소리? 웃기고 있네. 나보다 네가 나를 잘 안다고?" "뭘 아는데?" 되물어 봅시다. 과연 내가 나를 모르고 있는지, 나보다 주변 사람을 더 잘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게 되는 주변 사람들이 과연 나를 나보다 잘 알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에 대해 자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주변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자꾸 물어봐야 합니다. 나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기에 대답을 찾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질문을 하게 되는 묘한 엮임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에 대한 욕망의 불씨는 심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몰랐을 뿐입니다.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이 정확해야 답도 정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질문을 던지면 정확한 답은 누가 어떻게 낼까요? 포털 사이트를 뒤지면 나올까요? 과학의 신이라는 구글링을 하면 그 안에 해답이 있을까요? 질문의 수준이 답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한 질문은 자기만이 해답을 낼 수 있다는 특이한 질문입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나에 대한 정의를 쏟아낼지라도 나만이 나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아브락삭스에서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지도 본인의 몫이며 엠비밸런스(Ambivalence)의 이중감정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더 발현시킬 것인지도 본인의 역량입니다. 누가에게나 해당하는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치환하는 '바넘 효과'의 유혹에서 벗어나 정말 자기만의 특성을 찾아내는 일, 이것이 자기에 대한 질문입니다.


남들이 아는 나에 대한 겉모습을 치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내면의 심연을 강화하기 위한 질문을 던져 봅시다.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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