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잔뜩 머금은 먹장구름의 발걸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빨라 출근길을 재촉하더니 사무실 근처에 도착하니 햇살이 구름 사이로 화사하게 내리비치고 있습니다. "휴! 서울이 넓은 건가요? 아니면 비구름과 햇살 사이의 경계선을 방금 지나와서 그런 걸 가요?" 카톡방에 출근인사를 하는 지인들의 문자 속에는 비가 내리는 풍경도 섞여있는데, 백팩 속에 든 우산을 펼쳐들지 않고 사무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지금 제 머리 위 하늘은 먹장구름 대신 푸른 하늘에 흰색 구름이 뭉게뭉게 산재해 있습니다.
사실 자연현상에 좋고 나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현상 자체는 현상 자체일 뿐입니다. 이 현상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간사함이 해석을 달리할 뿐입니다. 그 해석에 따라 기분조차 좌우됩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기도 합니다. "이게 뭐야? 날씨에 따라 기분조차 좌지우지되고 있는 거야?" "날씨의 맑고 궂음에 따라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또 그 안에서도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나쁜 날씨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는 것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도대체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기준점이 있는 거야?"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기분이 동화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침 마음 상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니 끝없이 이어집니다. 질문만 늘어놓았지 사실 해답은 없습니다. 해답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해답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태가 되었던 그것은 현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한 것 중의 하나이기에 그것 자체가 정답이 되는 겁니다. 바로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에는 무한대의 가정과 무한대의 결과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확률적 결정론으로 자연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정답임을 그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순간, 측정하는 순간 바로 존재로 등장을 합니다. 정답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의미부여가 없으면 자연조차도 존재 의미가 없어집니다. 자연 자체도 인간의 브레인이 만들어낸 관계 속에서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브레인은 자연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동시적 관계의 차이를 비교하고 그 차이를 형상이라고 인지하고 만들어내는 착각만이 있을 뿐입니다. 비교에는 정확성이 없습니다. 차이만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연의 실재를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창의적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하고 가정에 따른 확률적 행동을 하는 주체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SELF의 출현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 지각과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내 안의 해석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인공지능을 통한 가상세계로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혁명이 아니라 바로 인간 진화 과정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하는 답습일 뿐입니다. 모방은 창조를 낳는다는 진리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먹장구름 걷히고 그 사이로 비친 햇살 한 줌 받으며 기분이 좋아졌던 순간의 해석이 참 멀리 왔습니다. 지각과 의식을 거쳐 창의성을 지나 인공지능에 까지 왔으니 말입니다. "기분 좋다"는 의식은 그렇게 현재 이 시간을 지배하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들이 모여 오늘 하루의 순간들에 활력을 부여하고 그 활력을 바탕으로 의미가 부여되면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고 표현할 겁니다. 그렇게 잘 산 하루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한 사람의 일생으로 나아갑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한 겁니다. 그렇게 착각을 현실로 오해하고 좋은 것인 양 도배를 하고 살면 살아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살아야 된다면 침울해하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즐거운 일만 해도 다 못할 인생이라고 합니다. 재미있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그 또한 그렇게 되는 게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하루를 맞이하시겠습니까? 즐겁고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면을 거시죠. 큰 소리로 웃어보시죠.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