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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14. 2021

SNS에 꽃 사진 올리면 꼰대?

꽃 향기의 기억도 전하자

SNS에 꽃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꼰대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조소가 섞인 비아냥을 듣던 말던 "꽃이 좋고 내가 좋은데 뭔 대수?"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꽃 좋아하는 것이 꼰대의 시작이라면 차라리 꼰대가 되겠다고 합니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꽃을 좋아한다는 과학적 증거와 학술논문은 아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가정해놓고 그런가 보다 하고 가져다 붙여 개념을 만들어버리고 통념으로 삼아버립니다. 잘못된 개념이 자리 잡는 가장 원초적인 현장입니다. 그저 나이듦에 대한 보상심리로 꽃이라는 새로 피어나는 생명현상을 치환해, 젊다는 것을 반증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추측하는 것입니다. 착각의 오류입니다. 나이듦과 꽃 사진의 SNS 출몰은 전혀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상관관계도 아닙니다. 결국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삭막했던 계절이 지나고 봇물 터지듯 산하를 뒤덮는 꽃들의 향연을 SNS로 옮기지 못하는 관찰자의 소심함이 오히려 계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보이면 보이는 데로 예쁘면 예쁜 모습 그대로 아름다움을 지인들과 공유하면 됩니다. 미처 가보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자연의 색상을 SNS를 통해 전달하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고 화사하게 만드는 전령이 됩니다.                                                                                                              

오늘 아침은 조금 쌀쌀한 듯 하지만 청명한 하늘이 그 쌀쌀함을 상쾌함으로 바꿔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색을 더욱 색답게 하고 있습니다. 초록은 더욱 초록이게 하고 하얀 것은 더욱 희게 합니다. 신체의 오감 중에서 유독 시각적 효과에 의지하는 비율이 큽니다. 그만큼 색은 강렬한 생존의 조건이었음을 반증합니다. 색이 色으로 읽히지 않고 다른 색으로 읽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음이어에 강렬한 생존이 걸려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지천으로 널린 꽃들에 다가가 코를 들이대고 꽃이 전하는 향을 맡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그저 바라보는데 익숙합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꽃을 모습을 담아내는 데는 더욱 익숙합니다. 예쁜 모습을 지인들에게 자랑도 하고 보여주고도 싶은 마음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계절의 온도가 높아 이미 희디흰 목련꽃은 저버렸고, 노라디 노란 개나리도 그 자리에 진녹색의 잎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희다 못해 연분홍이었던 벚꽃 조차도 이젠 꽃비가 되어 하수구 한켠에 쌓여있습니다. 그 많은 봄 꽃들의 자태와 색상은 이제 스마트폰의 사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꼰대를 탓할 것이 아니라 꼰대는 계절 속의 꽃을 사진으로 저장해 기억으로 회상하게 해주는 시간의 관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많은 봄꽃들을 사진으로 담느라 그저 쳐다보고 시각적 아름다움에 취하고 맙니다. 우리 브레인에서 시각중추가 차지하는 비율이 40%를 넘으니 당연한 것입니다만 당연한 것에 이끌려 디테일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들여다보고 다가가면 전해지는 향도 꽃을 꽃답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꽃의 향이란 꽃이 전하는 분자의 확산이라고 과학적 답변을 내놓으면 의미가 살지 않습니다. 향은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의 이미지 조합을 통해 의미를 붙여놓은 비가시적 형상입니다. 향, 냄새 하면 그 기억 속의 냄새와 일치를 시키는 놀라운 브레인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젖 냄새 같은 기억 말입니다.


기억의 향은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 기억 속에 맡았던 향기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은 향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기억의 합리화입니다. 과거와 모양이 같았으니 향도 같을 것이다라는 합리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물도 현존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브레인이 해석하는 데로 보이는 것이며 그 해석하는 데에도 시간적 오차범위가 존재합니다. 바로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태양의 광자가 사물에 비치고 그 반사되는 빛 알갱이를 나의 시각세포가 인지하여 뇌로 전달되고 그때서야 '아 저것이 저기 있었구나' 알게 됩니다. 그 깨닫는 순간이 찰나적이지만 분명 시간의 오차가 존재합니다. 내가 깨닫는 순간 사실은 눈 앞의 사물은 바뀌어져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태양빛이 8분 20초 전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며 밤하늘에 반짝이던 시리우스 별빛은 4년 전에 출발한 빛입니다. 지금 당장 태양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 눈에는 8분 20초 동안 태양이 존재하며 빛을 내는 것으로 인식할 겁니다. 우리가 실체적 사실을 직시한 후 인문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별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상상의 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체가 아닌 허상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의미의 장'에 갇힌 인문학의 힘도 인간세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실체를 바로 보는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그저 상상일 뿐입니다. 허상보다는 실체에 다가서는 자연의 풍광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순간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꽃향기에 인문을 더하면 더욱 확실한 실체로 다가옵니다. 킁킁거리며 꽃들에 코를 들이대 볼 일입니다.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그리고 외양의 화사한 색깔까지도 보게 되면 비로써 꽃이라는 존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라일락 꽃에 대한 향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입안에 씹던 껌의 향으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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