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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30. 2021

"내일부터 통금시간 밤 10시야!알았어?"

염려와 통제는 말 한마디, 문자 한 줄 차이

세상이 하 어수선하니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들도 늘 걱정입니다. 밤 12시가 되도록 전화나 문자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녀를 하염없이 기다려본 부모들은 걱정이 앞서, 오만가지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감는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요즘처럼 코로나 19 정국에 밤 10시면 식당 문도 모두 닫는데  12시 가까이 시간이 다가오면 불안해져서 계속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며 잘 귀가하고 있는지 확인 또 확인합니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각 거실로 나가 자녀의 동향을 살핍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자녀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내려앉으며 버럭 화가 납니다. "뭐하느라고 전화도 안 받고 문자를 보내도 답신이 없는 거야?" "누구랑 이 시간까지 같이 있었어?" "술 마셨냐?" 등등 그동안 상상했던 온갖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자녀가 무사히 귀가했다는 안도감이 역으로 표출되는 순간입니다. "너 내일부터 통행금지시간 밤 10시야! 알았어?"로 결론을 냅니다. 그렇게 귀가 시간에 못을 박아놔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반면 집에 늦게 들어온 당사자는 이미 현관문 앞에 섰을 때부터 혼날 것을 예상하고 긴장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늦은 귀가시간이지만 또 불같이 화를 낼 부모님의 모습이 훤히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귀가시간을 밤 10시로 제한하겠다고 하실 것이 틀림없음도 눈치챕니다. 혼날 것을 각오하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과 통제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자녀에 대한 통제는 가장 큰 폭력이 됩니다. 심지어 정신을 무너뜨리는 폭력으로, 신체적 폭력 이상으로 심각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가정폭력 하면 멍들고 피나고 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피멍 든 장면이 눈에 보이니 너무 자극적입니다. 언론을 통해 너무 많이 봐왔고 지금도 뉴스 시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제의 폭력은 신체적 물리적 폭력 이상입니다.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너를 보호해야 하기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거지" "그래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거야. 혹시 밖에서 나쁜 일 당할까 봐" "봐봐 세상이 얼마나 무서워" "알았지? 일찍 일찍 다녀. 앞으로 통행금지시간 꼭 지키고. 지켜볼 거야!"


가정에서 염려와 통제의 경계는 정말 애매합니다. 가족이라는 틀,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경계에서 이 염려와 통제는 혼동 정도가 아니고 동의어로 여기게 됩니다. "자식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한 게 뭐 아버지로서 당연히 말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럼 뭐 자식이 늦게 오던 말던 가만히 놔두라고? 밖에서 다치던 깨지던 그냥 놔둬? 그게 가족이야? 몽둥이를 들어서라도 버릇을 고쳐놔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 아니야?"라고 통제와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일견 부모로서 당연한 주장처럼 보입니다. 


바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에 대해 가정에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늦게 들어온 것이 문제라면 다음부터는 늦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늦더라도 늦는다고 사전에 문자나 전화를 주어 상황을 알려주도록 하면 됩니다. 그 방법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라는 위치가 절대적 힘입니다. 강압적 형태의 통제로서 자녀의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자녀 스스로 행동을 바꿀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설득의 기술입니다. 늦게 들어오면 부모님이 걱정할 것이라는 것을 자녀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늦게 들어온 것을 가지고 버럭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미 자녀들은 늦은 것에 대해 주눅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기에 늦은 것에 대해 채근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그저 "좀 늦는다고 문자라고 보내지"라는 정도만 해도 다 알아챕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이심전심입니다. 통제하는 것이 이니고 걱정해주시고 염려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은 자녀들은 금방 눈치채는 것입니다. 염려와 통제의 경계는 이렇게 말 한마디, 문자 한줄에 달려 있습니다.


이 통제는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친한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서조차 발생합니다. 바로 관계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등장하게 되고 힘과 조건을 가진 자가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통제는 권력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관계에서 통제의 역할은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조절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의 배려와 아량이 전제가 되어야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힘의 균형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통제를 권력의 맛으로 여기다 망가진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봐왔습니다. 가족은 사랑입니다. 가장들의 아량과 배려, 희생과 봉사로 유지되는 최소한의 공동체입니다. 통제의 말보다는 사랑의 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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