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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8. 2021

"술 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 고백

아무리 그날 저녁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려 열흘 동안 틈틈이 기억의 늪을 헤매며 단서를 찾으려고 해도 끄나풀 하나 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기억이 칼에 잘리듯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열흘의 추적을 끝내고 고백한다. 기억이 나지 않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충격이었다. 술을 마시고 당시 상황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말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정말 평생 한 번도 술 마시고 나서 기억이 안 난다는 현상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필름이 끊길 만큼 안 마셔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술 마시고 기억이 안 난다"는 주장은 나에겐 그저 변명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넘어 "거짓말하고 있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왜? 한 번도 기억이 끊긴 적이 없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30년 넘게 홍보업무를 하면서 술이 세다는 기자들과 수없이 많은 술자리를 했지만 홍보담당자의 숙명과도 같은 '마지막 지키기 역할'로 인해 정신만은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버텨냈는지도 모른다. 길바닥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전봇대를 끌어안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경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 모른다. 아니 내가 소속된 회사의 홍보실의 전통이 그랬다. 결코 기자보다 먼저 술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암묵적 철칙이 있었다. 그렇게 회사생활에서도 버텨왔던 정신줄이 지난 어버이날 전야에 집 거실에서 무너져 내렸다.


내 기억의 한 귀퉁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억을 연결하려고 무려 열흘을 기억의 저편을 헤매고 있었으나 정말 그 저녁의 기억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가? 술 취하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체력이 떨어진 것일까?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음을 한 순간 증명해버린 것일까? 집사람과 큰애한테 지난밤 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평생 한 번도 술 취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 그날 밤 사건의 현장을 회상해 오버랩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창피해서 임이 먼저일 것이다. 내가 스스로 기억을 연결시켜보고자 계속 그날의 필름을 되돌려보지만 그 끊어진 이후의 필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릎과 어깨와 가슴에 멍이 들어 있는 단서는 있었지만 이 단서가 기억의 연결고리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저 신체의 상처가 마음의 상처보다 크지 않음을 위안 삼고 충격을 삼킬 뿐이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의 전 상황은 이렇다. 5월 7일(금) 늦은 퇴근길, 큰 아이로부터 휴대폰 문자가 온다. "집에 10시쯤 친구들 올 거니까 참고요!"


친구들이 온다고? 그런가 보다 했다. 집에 들어가니 거실에 큰 아이 동네 친구들이 3명이 와 있다. 이미 와인 한 병을 마시고 있는 중이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모두 같이 다닌 녀석들이다. 지금은 다들 어엿이 사회에서 일익을 하는 청년들이 되어 있다. 아이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 내심 반가운 마음이 우선한다. 대뜸 "애들이 장식장에 있는 양주 마시고 싶다는데?" 한다. 거실 장식장에는 정말 30년 가까운 세월 장식만 되어 있던 양주들이 줄줄이 서 있다. 내가 평소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에 장식장에 있는 양주는 말 그대로 장식일 뿐이다. 코르크 마개인 코냑은 뚜껑을 따면 코르크가 부서져 송곳으로 빼내고 마셔야 할 지경이다.


일단 밸런타인 17년 산을 꺼냈다. 언더락 글라스에 얼음을 넣고 한잔씩 돌렸다. 젊은 청춘들이라 바로 원샷을 하네. "짜식들 술 예절은 잘 배웠네" "그래도 천천히 마셔라 취한다" "나는 평생 사회생활하면서 술 취해본 적이 없다" 호기롭게 한마디 하고 나도 원샷. 그렇게 한 3잔쯤 마시니 밸런타인 1병은 바닥. 다시 장식장 앞으로 가서 또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스코틀랜드 싱글 몰트 위스키 그렌피딕이다. 마시는 속도는 밸런타인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역시 병에서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보인다. "아버님 요즘은 양주 먹을 일이 거의 없어요. 소주에 맥주 마시지 비싼 양주 먹어 봐야 돈이 아깝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하지만 오늘은 아버님께서 주시니 다양하게 마셔 보네요"


여기에 넘어간 것 같다. 글렌피딕이 바닥을 보여 다시 장식장 앞으로. 이번엔 헤네시 XO 코냑 한 병을 손에 들었다. 비닐커버를 벗기고 마개를 따는데 코르크 마개라 부서져 버린다. 이놈의 코냑은 장식장을 지킨 지 30년은 되는 것 같다. 주방으로 가서 칼로 코르크를 제거한다. 그리고 거실 테이블로 다시 왔다.


딱 여기까지가 기억에 남아있는 현장 모습이다. 그 이후는 아무 기억이 없다. 조각난 파편으로는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아 구토를 하고 있던 기억들이 있는데 파편이라 연결이 되지 않는다. 아침에 정신을 차려보니 옷은 갈아입고 있다. 내가 갈아입었나? 갈아입혀 줬나? 전혀 기억이 없다. 그리고 내려다본 무릎에 멍이 들어있다. 아니 어깨도 아프다. 헉 가슴에 통증까지 온다. 이게 뭐지? 화장실 오다 넘어졌나? 역시 기억이 없다. 방안에 구토 냄새가 진동한다. 이불 홑청은 모두 세탁기 안을 맴돌고 있다. 방에서도 구토를 한 모양이다. 거실로 나가보니 소파 시트도 모두 벗겨져 세탁실로 가 있다. 이런 거실에서도 구토를 했나?


순간 창피함이 몰려온다. 큰애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앞에서 내가 구토를 하고 넘어지고 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니 더욱 민망하다.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억을 재생하려 애만 쓰다가 8일 어버이날을 맞았다. 한낮이 되어 어버이날인데 고기라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런데 물 한잔 마시지 못하겠다. 술병이 났다. 신체의 술병보다 마음의 술병이 더욱 상처를 깊게 한다. "이런 제길 어제저녁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연결이 안 되고 있어? 애들은 언제 간 거야? 내가 주사라도 부렸나?" 집사람과 큰아이한테 사건의 현장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한마디 물어보지 못했다. 아빠이자 가장의 자존심일까? 그렇게 기억의 끄나풀 잡기를 열흘 동안 해봤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술 마시는데 '적당함'을 주지했던 세종대왕의 적중이지(適中而止 ; 지나치지 않고 적당히 그칠 줄 안다)를 나름 지켜왔던 나의 술 마시 기는 그날 그 한방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충격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술을 안 마신다고 단주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지난 그날의 충격이 떠올라 많이 마시는 일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어때요? 내일 공휴일인데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시려오?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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