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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0. 2021

잔혹한 야만의 충격

아프가니스탄 소식을 접하고 있은지 일주일째 되어 갑니다. 부패한 정권이 도망가고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 벌어지는 살벌한 살육과 만행을 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속 깊은 스토리에 무지하여 그저 화면에 전해지는 충격적인 현상만 눈에 띕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살인을 봅니다. 눈을 돌립니다. 신문을 덮습니다. TV 채널을 돌립니다. 야만의 현장에 정서가 흔들릴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벌어지는 줄 알고 돌린 채널에서조차 비슷한 모습이 보입니다. 끝 모르게 곤두박질치는 우리 정치판에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우리의 정치판 수준이나 아프가니스탄 정치판 수준이나 그놈이 그놈처럼 보입니다. 종교만 빠져있을 뿐입니다.


"한국 정치판을 너무 卒로 보고 있다"구요? "한국 정치판은 모두 계산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고도로 진화한 정치형태"라고요? "그나마 한국 정치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것 아니냐?"구요? "그렇게 개판으로 보고 있다면 네가 해봐?"라고 다그친다면 꼬리를 내리겠습니다. 정치는 그 물에 들어가 계신 분들께서 하셔야 하고요. 저희 같은 범인들은 그저 잘하고 있는지 관심 갖고 들여다보며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것 같으면 쓴소리 한마디 하는 것으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너나 니 일이나 잘해 인마!"라고 윽박지르면 그냥 깨갱하고 쭈그리고 있겠습니다.

문명화된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야만의 사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요? 야만(野蠻)은 들 야에 오랑캐 만입니다. 문명의 정도가 뒤떨어지고 미개한 상태를 뜻합니다. 단어 자체에 수준을 말하는 수위가 들어있어 다른 문화를 비하하는 모양 샙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데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습니다.


탈레반 치하에서 벌어지는 야만의 행위에는 종교가 한몫 차지하는 듯합니다. 개개인의 목소리보다 종교의 목소리가 더 큽니다. 종교의 그늘에 자신을 숨길 수 있습니다. 내가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신께서 정한 계율을, 나는 그저 따를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과 죄책감이 없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참수를 감행합니다. 사실 이런 야만의 시대는 인류사에 있어서 수없이 등장해온 사건의 현장입니다. 중세 서구 사회의 가톨릭이 그랬고 쇄국이 대세였던 1800년대 조선의 땅에서도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그 잔혹함을 경험하고 나서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깨닫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사회의 성숙도입니다. 우리 사회는 종교의 탈을 벗고 대신 무력 진압과 진보와 보수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옭아매는 전법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크게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멀리 이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그저 싸움 구경하는 재미있는 이벤트로 야만의 현장을 건너다봐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에게는 저런 야만의 시대가 재현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종교적 갈등도 없는 사회라고 치부할 수 없습니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보다도 작습니다. 작금의 정치판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총 만 없을 뿐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이 한심한 행태조차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다르죠? 그렇죠? 바르게 갈 것이 틀림없겠죠? 걱정할 필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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