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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3. 2021

거짓이라도 통용되면 가치가 있는가?

참과 거짓에 대한 명제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옳다고 믿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옳음과 그름, 참과 거짓의 기준은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합의를 해야 가능한 일일까? 객관적 진실은 있는 것일까? 어떤 것이 객관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주관적인 것일까? 시대적 상황과 가치관이 변함에 따라 옳음과 그름의 기준도 변하는 것일까?


인간관계를 다루는 인문은 이만큼 복잡다단하다. "진실은 이것이다"라고 단언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아니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는 주장들이 정반합의 곡선을 그리며 변화한다. 어떤 가치가 더 우세 해지는지에 따라 해석의 높낮이도 변해간다. 참으로 복잡 미묘한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심지어 인류는 3천 년 가까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는 것이 있다. 믿고 있기에 인류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로 작동한다. 통용되고 나면 맞고 틀리고,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작동하는 것으로 이미 믿음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기에 권력이 되고 힘이 되어 밈처럼 동작한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경험하고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다. 숫자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으면 존재가 된다. 있다 없다의 실체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 거짓일지라도 사회가 굴러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기에 오랜 세월, 인류의 저변을 지배해 오고 있고 그 가치는 아직도 유용하며 앞으로도 가치를 지닐 것이다.

인간의 시각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패턴으로 사물을 본다. 시각영역으로 입력된 감각이 브레인에서 형상을 만들어낼 때 이미 경험한 형체의 패턴으로 비교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구름 모양을 보고 사람 얼굴이라는 등, 토끼와 사자를 닮았다고 인식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이 파레이돌리아적 패턴 해석 방법은 인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생명에 위협을 주는 대상인지 아닌지, 친근한 사물인지 아닌지를 가장 빠르게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형상을 언어로 표현을 하여 대상을 확정하는데, 형상에 단어가 매핑되는 과정이다. 형태에 언어가 매핑되어야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여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생존 인식 방법을 인문으로 끌어들여 서사를 만든다. 등산을 가면 볼 수 있는 수많은 사자바위, 코끼리바위, 거북바위, 용머리, 독수리바위 등등, 심지어 장군바위, 망부석, 여인봉, 선녀봉 등등 인문의 틀을 덧입은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름 붙여진 바위 형성 원인과 바위의 재질에 대해 설명해 논 문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현상의 본질은 어디 가고 화강암과 현무암도 구분 못하는 인문의 이야기만 덧씌워져 있다. 


심지어 벽에 있는 전기 콘센트 구멍을 보고도 사람 얼굴 형상을 떠올린다. 그 구멍이 웃고 있는지, 무표정인지까지 감정이입을 시키기도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내가 믿고 싶은데로 믿으면 그것이 진실이 되고 믿고 싶지 않으면 거짓이 되는가? 참과 거짓의 구분이 러시아의 라스푸티차(Rasputitsa) 진흙탕 길을 벗어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라도 진실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영원한 참이다. 참의 기준이 달라질지라도 진실은 항상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찾아 계속 걸어가는일, 그 길에 호롱불 하나 걸어두는 일이 진정한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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