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Aug 31. 2021

논쟁의 본질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아 멱살 잡는다

간접 경험과 모방을 통한 진보는 한낮 바람에 나부끼는 먼지와 같은 것인가? 직접 체험하고 부딪혀 피 터지고 땀 흘려봐야 자기 것이 되는 것인가? 남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잘 된 것은 모방하고 잘못하고 있는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 개선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모방은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왜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중국은 모방을 창조적 단계로 확전 시켜 세계 초일류국가로 도전하는데 우리는 그냥 모방으로만 그치고 마는가? 덩치가 적어서 그런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1870년대 '자유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이 제시했던 내용들이 오버랩된다. 생각과 표현의 자유 보장, 관용의 풍토 확립, 무상 초등교육, 최저생활보장, 환경보호를 위한 개발 중단 등이 그것이다. 밀의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산업사회의 모순인 다수 대중의 횡포, 빈부격차, 의회의 부패와 무능, 개인주의 만연 같은 현실의 반작용을 직시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초기 어둠 속에 직접 있었기에 극복의 지혜를 발현할 수 있었다. 경험하고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벽돌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당시 한반도는 조선 후기,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1866년 병인양요, 19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기다.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겠으나 물질문명의 뒤쳐짐이라는 초라함에 더해 정신적 시스템조차 차원을 달리했던 괴리감은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150년 전에 밀이 주창한 내용을 우리 사회는 이제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선조들의 권력 지배층은 무얼 하고 계셨나? 세계 문명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문 닫아걸고 앉아있다 제국주의의 포화 속에 쑥대밭이 되어 버리고 결국 나라까지 팔지 않았던가?  조상 잘 만나서 떵떵거리고 사는 서구사회를 부러워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의 권력층을 흐르는 기류는 왜 이렇게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이는 것일까? 깨지고 터지고 경험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일까? 이 과정을 지난하게 지나고 나야 겨우 사회가 합일되어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것인가?


그런데 이 사회적 합일 또한 요원해 보인다. '사회적 합의'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사회적 합의'는 시간 끌기의 전형이며 본질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많은 논쟁을 들여다보면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곁가지 가지고 싸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심지어 도로에서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도 사고의 정황에 대한 상호 주장이 아니고 "당신 나이가 몇이야? 어린놈의 자식이 건방지게!"로 비화한다. 이렇게 되면 삿대질과 멱살잡이로까지 번진다. 사고의 본질은 어디 가고 감정만 남아 씩씩대고 있다.


150년 전, 밀은 "내 자유의 한계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될 때부터"라고 했다. 자유에도 선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인 언론중재법의 국회 입법 상정과정을 보면 바로 이 자유에 대한 혼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론 자유와 언론인의 자유'는 구분되어야 한다. 언론 자유는 언론인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국민들이 말하고 주장할 자유의 권리다.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언론인의 자유에는 책임이 반드시 따르는 것이 맞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언론 자유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인의 자유를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질을 다시 들여다볼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글을 쓰는 것'과 '일기를 쓰는 것'은 다른 일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