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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5. 2021

보일락 말락 해야 더 야하다

라마찬드란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경과학적 원리 10가지 중에 은폐(concealment)가 있다. 은폐(隱蔽)는 숨을 은, 가릴 폐자로 어려운 한자 이기도하다. 군대에서야 생존 전술로 사용하는 일상 용어로 적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는 기술을 말한다. 단순히 숨는 전술이기에 방어력이 없다. 반면 엄폐(掩蔽)가 앞에 물리적 장애물을 두고 가리는 기술이라 목숨 부지하기에는 더 효율적이다.


"보이지 않게 가린다"는 의미는 이렇게 미학에서부터 생존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미학에서의 은폐는 진화생물학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숨겨진 것을 찾아야 하는 쪽으로 진화되어 왔기에, 찾고자 하는 것의 작은 실마리라도 있으면 실타래 감듯이 그 흔적을 따라가 기어코 실물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끝에서 만나는 실물이 먹이가 되었든 위험이 되었든 아름다움이 되었든 말이다. 확인을 해야 하는 욕망이다. 확인은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래서 보일락 말락 가린 누드가 더 야해 보이고 정형화된 도시의 거리보다 구불구불 끝이 보이지 않는 시골길이 더 매혹적인 것이다. 브레인의 탐색모드를 자극하기에 그렇다. 단서는 있는데 결과가 보이지 않으니 계속 따라가게 만든다. 브레인은 아예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의 그림으로 채워 넣고 그 곡선의 길을 따라가 확인하게 만든다. 은폐를 아름다움의 구성요소로 삼는 이유다.


우리는 모든 걸 보여주는 TV보다 소리만을 들려주는 라디오에 더 집중하는 것을 안다. TV가 보편화되기 전,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연속극에 더 열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다 보여주는 TV를 바보상자로 만든 라디오의 기적은 바로 보여주지 않지만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연속극으로 이입시키는 마력을 가졌기에 가능하다.


얼마나 잘 가리고 잘 감추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가려버리면 은폐는 잘했을지 모르지만 아무 자극을 주지 못한다. 보일락 말락. 참 어려운 경계다. 얼마만큼 보여주어야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미학에서의 은폐는 항상 단서를 남겨야 한다. '보일락 말락', 시간을 지연시켜야 한다. 그 지연된 시간 동안 능동적으로 찾게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찾았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아름다움은 '감각을 지연시켰을 때 느끼는 시간차'에서 온다. 감각을 지연시키는 방법이 바로 숨기는 것이다. 숨겨진 것을 찾는 인간 심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절정의 사기꾼은 바로 가장 순진해 보이는 것'이다. 밀당을 잘한다는 것은 보여줄 듯 말 듯, 줄듯 말 듯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얼마만큼 밀고 당길 것인지 시간의 지연은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니 눈치껏 해야 함은 자명하다. 절정의 사기꾼은 바로 이 가장 순진해 보이는 순간을 상대방이 믿게 만드는 능력의 소유자만이 가능하다.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카사노바는 여인을 유혹할 때 진심을 다한 정성을 보여줬다고 한다.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상대방을 행복하도록 느끼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바람둥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지질한 바람둥이야 흔할 테지만 말이다.


장자 대종사 편에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는 표현이 있다.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못에 감추고는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지고 달아나더라도 어두운 자는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잘 감추어 두더라도 달아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달아날 수가 없다. 이것이 영원한 존재의 큰 실상이다" 


감춘다는 의미가 미학을 넘어 생각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토마스 매징어(thomas matzinger)는 " 우리는 누구도 이런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누구도 아닌 존재로 죽으며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겪는 혼동 때문에 누군가로 착각하게 된다"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삶 전체에서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천하에 널려있고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일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도전이다. 내가 숨긴 것도 있고 누군가 감춘 것도 있다. 그렇게 세상은 서로 간의 감추고 숨긴 것을 하나씩 찾아내고 내가 숨긴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네가 감춘 것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하고 얼싸안고 웃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보일락 말락 하고 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싶어 애가 타서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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