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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27. 2021

산다는 것은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장소,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세상 사는 일은 불공정과 불공평으로 시작된다. 존재의 시작을 스스로 선택해서 세상에 나오는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철저한 불공정이다. 불공정이 근원이지만 이 불공정을 공정이라는 공간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어 시지프스처럼 언덕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찾아간다. 그 과정에 모든 희로애락이 펼쳐진다. 공간과 장소가 무한대가 된다. 참 넓고도 광활하다. 심지어 지구라는 공간을 떠나 화성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차지하려 하는지가 사는 모습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항상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펼쳐지고 있다. 출근하는 사람은 직장이라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고 아침 해장을 위해 콩나물 국밥집을 찾는 사람은 식당으로 간다.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안방이라는 장소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곳, 내가 있는 모든 곳이 바로 장소이자 공간이다.


내가 있는 장소와 공간이 나를 결정한다. 어디에 있는가가 그 사람의 명함이다. 직장이라는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이 결정되고 그 사람의 일이 드러나며 그 사람의 품격과 그 사람의 성격까지도 규정된다. 현재 자기가 있는 공간과 장소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기꾼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자기가 있는 공간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있고 싶어 하는 공간과 장소를 찾아가는 일, 바로 산다는 행위다. 오로라를 보러 가는 일도 자연의 향연이 펼쳐지는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고 사랑하는 연인과 분위기 있는 카페를 가고자 하는 것도 둘 만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줄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현재 있는 장소가 그 사람의 현재를 규명하고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지만 처음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 불공정의 장소임을 알게 되는 순간 당황스럽다. 탈레반이 점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하는 아이나 현대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 태어난 아이와 캘리포니아 베버리힐스에 수영장이 있는 저택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주어진 공간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이다.


생명체의 본질이다. 태어날 곳은 그냥 내 던져지듯, 공기 중에 흩뿌려지듯 산포 된다. 너무 운명론적인 시각인가?  하지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 "나는 왜 지지리 못 사는지?" 자책할 것이 아니고 "우리 아빠는 재벌이야!" "나는 팬트하우스에 살아!"라고 거들먹거릴 것도 없다. 시작은 차별적이나 끝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 차별을 좁히기 위한 행보가 인류의 역사다. 


장소와 공간을 목표에 맞게 새로 규정해야 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책이 쌓인 도서관으로 가야 하고 앞선 멘토를 찾아 방향 설정을 해야 한다.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장으로 가야 한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있고 싶은 곳이 곧 나의 미래이자 운명이다.


어떤 장소에 있고 싶은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거스를 수 없는 공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대지와 시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공간은 본인의 의지대로 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출생이라는 시작과 죽음이라는 끝의 공간 사이에 있는 동안 나의 작은 공간을 만들고 허물어지지 않게 견고히 방비하는 일이 삶의 전체 모습이다. 다락방이든 오두막이든 실물의 공간이 될 수 도 있고 메타버스의 가상공간으로 들어가도 좋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나는 지금 내가 만족할 공간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지 되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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