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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01. 2021

종이에 쓰지 않으니 필체가 더 엉망이다

책상 위의 필기구 중에 주로 어떤 것을 사용하시나요? 주로 볼펜을 사용하실 테지요. 필통 꽂이에는 연필과 사인펜과 형광색 메모리 펜도 있을 것이고 가끔 붓펜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필통에는 10여 개 넘은 필기도구들이 있지만 손이 가는 것은 정해져 있기 마련입니다. 형광펜이나 붓펜처럼 특정 기능을 하는 펜은 예외이긴 합니다. 쓸데가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형광펜이야 책을 읽다가 중요한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 줄을 칠 경우이거나 서류에 중요 단어나 강조 문구에 형광칠을 할 경우에 주로 사용합니다만 요즘은 서류 작성해서 종이로 출력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필통에서 꺼낼 일이 없어졌습니다. 붓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조사가 생겨 봉투에 이름 쓰는 용도 정도밖에는 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필통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에게는 20년도 넘은 필기구 하나가 책상 위에 있습니다. 만년필입니다. 2001년 밀레니엄을 맞아 인천공항 개항을 하면서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알리탈리아항공 등과 '스카이팀' 제휴 행사를 했는데 그 행사 당시 선물용으로 홍콩에서 주문 생산해서 만들었던 것 중의 하나를 받은 겁니다. 검은색 '워터맨(Waterman)'인데 대량 주문하느라 비싼 것은 아니고 당시 대중화된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잉크 카트리지는 스쿠르 형태로 돌려서 보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년도 넘게 사용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술술 글씨가 잘 써지고 펜촉 잉크도 마르지 않고 잘 써집니다. 세월의 탓이긴 할까요? 써지는 글씨 굵기가 조금 굵어졌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나이 들어 작은 글씨가 안 보이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만년필이 보강을 해주는 듯해서 오히려 더욱 든든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 만년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오직 사무실 책상 위를 지키는 필기도구입니다. 20년이 넘은 세월 동안 온갖 회의 시간을 함께 했고 그 회의의 기록들을 글자로 수첩에 남겨주었습니다. 저의 회사 생활 2/3의 시간을 같이 했네요. 대견스럽습니다. 

그렇잖아도 지난주 책상 속에 있던 병 잉크가 바닥을 보이고 있어 점심시간에 책도 살 겸 교보문고로 잉크를 사러 갔습니다. 이 만년필을 사용하고 병 잉크를 7-8병은 쓴 듯합니다. 잉크의 색깔은 푸른색(serenity blue)만을 사용합니다. 종이에 써놓으면 검은색 잉크보다는 파란색 글씨가 더 예뻐 보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개인적 취향 때문입니다. 워터맨 잉크병은 6 각형 모양입니다. 분자 모형도를 그릴 때 6 각형 고리 구조가 떠오르는 형태입니다. 이 형태는 병 내부에 각을 만들어 잉크의 양이 줄어들어 만년필 카트리지로 빨아들이기 힘들 때 기울여 사용하면 불편 없이 잉크를 끝까지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든 아이디어가 숨어 있습니다. 병 잉크의 값은 50ml 한 병에 15,000원입니다. 잉크 값이 조금 올랐다고 하는데 저에게는 체감 가격이 싼 느낌이 듭니다.  


사실 요즘 웬만해서는 필기구를 사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마음자세로 학기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볼펜 하나라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겁니다. 대부분 책상 위의 볼펜들은 세미나, 포럼 행사장에서 받았던 것들일 겁니다. 요즘 제작되는 볼펜들은 기능이나 성능, 디자인들이 모두 훌륭합니다. 그렇게 필통 꽂이에 쌓인 필기구가 정말 많습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볼펜들도 여럿 있습니다. 


요즘은 기업들이 환경을 생각하고 비용절감을 강조하면서 'paperless 사무실'을 만드는 통에 필기구 사용은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필기구를 들고 종이에 무언가 쓴다는 행위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두 자판을 통해 화면에 글씨를 쓰는 형태로 필기라는 문화 현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포틀랜드 리드대학교를 중퇴하고 도강으로 들은 캘리그래피 수업이  나중에 애플의 예쁜 글자 폰트를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듯이 바로 글자를 종이에 쓴다는 행위로 인하여 글자체의 아름다움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화면상으로 구현되는 예쁜 글자체에 매료되어 내손으로 쓰는 글씨에 너무 무심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종이에 쓰는 현상과 컴퓨터 화면에 쓰는 행위는 생각을 표현해내는 과정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집중력과 논리적 전개에 있어서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에는 화면의 글들이 쉽게 수정이 가능하다는 편리성이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손으로 글씨를 쓰다 보면 지우고 또 쓰기가 녹녹지 않음을 압니다. 물론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로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무언가 지저분해 보이고 문장이 깔끔해 보이지 않아 차라리 다른 종이에 다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돼지꼬리 붙이고 각종 문장 도구 등을 삽입하여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종이에 쓴다는 행위는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있긴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뒷방신세로 물러난 행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시대가 종이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전환을 했지만 가끔 종이 위에 글을 써 볼 일입니다. 어떤 필기도구가 되었든 사용하여 생각을 적어볼 일입니다. 만년필 사용을 한번 해보시라고 추천드립니다. 만년필로 쓰면 일단 손가락과 손목에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아도 술술 쓸 수 있습니다. 만년필의 최대 장점입니다. 힘들이지 않는다는 현상은 생각에만 집중하여 쓸 수 있게 합니다. 손의 근육을 긴장시키지 않고 오로지 써 내려가는 글자와 생각에 몰입하게 한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화면으로 보는 글과 종이 위에 써놓은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전혀 다른 감각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때론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감성을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LP레코드판으로 듣는 음악이 더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랜만에 옛날 감각을 살려 종이 위에 짧은 문장 하나라도 써보시지요. 숨죽여 감춰져 있던 예전의 감성이 스멀스멀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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