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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20. 2020

20년 된 선물, 30년 된 선물

제 사무실 책상 위에는 20년 지기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사실 30년 가까이 같이 있는 녀석도 책상 서랍 속에 있기도 합니다. 서랍 속에 있는 녀석은 손톱깎이입니다. 잉? 30년 된 손톱깎이 라니? 손톱 깎다가 파상풍 걸리는 거 아냐?라는 걱정이 들 정도로 오래됐죠. 그래도 아직 쌩쌩히 자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대견한 녀석입니다.


그 손톱깎이는 정확히 28년을 서랍 속에 있습니다. 28년 전 사무실 선배께서 브라질 출장을 다녀오시는 길에 상파울루에서 샀다고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지금도 남미를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 부러움을 사며 브라질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건네준 선물이 손톱깎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여행 다녀오면 담배와 양주 한 병을 꼭 사들고 들어오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배도 아니고 손톱깎이를 선물로 나눠주었습니다. 다소 의외의 선물 소품이었는데 알고 봤더니 Korea 마크도 선명한 국산 손톱깎이였습니다. 선물을 사 온 선배 왈 "브라질까지 갔는데 전통 민예품이라도 사 올까 했는데 우연히 손톱깎이가 눈에 띄여서 봤는데 국산이었답니다. 멀고 먼 상파울루 시장 한 구석에서 팔리고 있는 국산 제품을 보니 안 살 수가 없어서 샀다"라고 합니다. 애국심이 철철 넘치는 선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해외에서 태극기만 봐도 눈물 나고 태극마크 그려진 비행기만 봐도 안심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아! 20년 된 친구 녀석 소개하려고 하다가 더 오래된 30년 된 친구 사연을 먼저 전했군요. 

20년 된 책상 위 친구는 만년필입니다. 2001년 밀레니엄을 맞아 인천공항 개항을 하면서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알리탈리아항공 등과 '스카이팀' 제휴 행사를 서울에서 했습니다. 그 행사 당시 선물용으로 홍콩에 주문 생산해서 만들었던 만년필입니다. 검은색 '워터맨'인데 대량 주문하느라 값비싼 것은 아니고 당시 대중화된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잉크 보충은 스쿠류 형태로 빨아올려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20년째 사용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술술 글씨가 써지고 펜촉 잉크가 마르지 않고 잘 써지고 있습니다. 참 오래도 쓰고 있지요. 잉크도 병으로 된 워터맨 잉크를 20년 동안 7 병 정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만년필 사용하는 사람을 보기 힘듭니다. 잉크를 보충하고 하는 일들이 귀찮아서 그렇기도 하고 컴퓨터로 문서 작업 들을 하다 보니 손으로 쓸 일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만년필이 이제는 아주 고급화 추세로 방향 전환을 했습니다. 비싼 만년필은 정말 비싸졌습니다. 고급 시계와 같이 중후하고 멋을 아는 사람만이 소장하는 물품이 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서명식 사인할 때나 사용되는 용도로나 가끔 보이고요.


하지만 제가 만년필을 선호하는 이유는 글을 쓸 때 손끝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볼펜이나 다른 필기구들은 종이 위에 글을 쓸 때 일정한 힘이 들어가게 되지만 만년필은 그저 만년필의 무게만으로도 슬슬 슬 옆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정하게 잉크를 흐르게 하는 게 만년필 제조 기술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 아버님들이 만년필을 많이 선물하셨습니다. 저도 중학교 들어가며 만년필을 선물 받았었습니다. 70년대 대중화되었던 만년필의 성능은 말 안 해도 다들 아실 테죠. 글씨를 쓰다 잠깐만 놔둬도 잉크가 안 나오고, 잉크를 나오게 하려고 휙휙 허공에 만년필을 뿌리다 잉크가 확 쏟아지곤 했습니다. 심지어 교복 주머니에 꽂아 두었다가 잉크가 흘러 흰 교복 상의에 잉크가 시커멓게 묻어 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 만년필은 20년을 같이 있으면서도 속 썩인 일이 한 번도 없네요. 온갖 회의 시간을 함께 했고 그 회의의 기록들을 적어 주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오롯이 지켜봐 온 파수꾼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펜촉이 다 닿아 가는 글씨가 굵게 나올지라도 "그래 글씨가 안보일까 봐 일부러 굵게 나오는 거지?"라며 위안을 삼을 때까지 사용하겠습니다.

책상 위와 서랍 속에는 나에게 소중한 오랜 친구 녀석들이 그렇게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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