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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14. 2022

지식은 훔치되 출처를 대라

인용의 기술

상대방을 설득할 때 제일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는 말이나 글의 출처를 밝히는 일이다. 특히 자료를 제시할 때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출처를 밝힌 말과 글은 신뢰를 높인다. 설교나 법문을 할 때 경전 문구를 인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경전에 이렇게 쓰여 있는데"라고 하면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경전은 이미 성인과 현인의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이니 믿을 수 있다는 기본 신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경전 문구의 해석 때문에 살육이 벌어지는 인류사의 피비린내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증거와 출처, 근거는 흔적이다. 이미 벌어져서 드러난 현상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각인되어 버린 화석이다. 공룡뼈처럼 과거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숨기거나 감출 수는 있어도 속일 수는 없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남의 것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해 보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 임포스터(imposter)의 가면 때문이다. 좋은 글이나 잘 쓴 글을 가져다가 마치 자기의 생각이나 창작물인 듯 내놓으면 남들이 자기를 뛰어나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인용하는 사람은 차용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다. 자기 것이 아니기에 들통날 것도 염려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허세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세의 유혹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기가 고민하고 조사하고 공부하여 내놓은 결과물이 아니기에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진다. 

학위논문을 쓸 때, 참조한 다른 논문들을 인덱스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본문으로 가져오는 사례를 수없이 보게 된다. 타인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 내용을 검증하거나 선행연구의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자기 연구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한다.


글을 쓸 때마다 이 도용의 유혹은 강력하게 작동한다. 창작의 고통이 크기에 도용의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도용과 차용 유혹의 일등공신은 시간이다. 마감시간에 쫓기기 시작하면 이 도용의 그림자 색깔이 점점 진해진다.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데 진척이 안되거나 시간에 쫓기다 보면 허둥지둥 옆에 있는 타인의 문구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도용과 차용에 있어 일반 지식과 학술 지식을 구분해야 한다. 일반 지식에서의 도용은 피할 수 없다. 세상의 지식 중에 자기가 스스로 만든 지식이 어디 있는가? 과거에 어떤 현인이 만들거나 말씀하신 내용이거나 글을 남긴 내용들이 쌓여서 지식이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교과서로 존재하고 학습을 통해 전달되고 전수되는 지혜로 존재한다. 불교 경전의 시작이 여시아문(如是我聞 ;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지식과 지혜의 전달에 있어 출처를 밝히는 기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학술지식은 개인의 노력이 들어간 지적재산권과 같다. 학술지식을 인용할 때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하는 이유다. 좋은 글과 말의 인용은 말과 글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잘된 인용은 말과 글의 맛을 살리는 양념과 같은 것이다. 흉내를 내는 것, 남을 따라 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지성을 폭발시켰듯이 인류 지식의 확장도 바로 따라 하기에서 나온 것이다. 학술지식도 우수한 성과가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은 결과물로 남겨진 것이다. 인류 발달에 도움이 된다면 인용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다만 그 성과물을 만들어낸 사람에 대한 예의로 출처를 반드시 밝혀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제 기능을 한다. 출처를 밝히라는 권유는 지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창작의 근간이 되고 선행자의 예우가 된다. 그렇게 지식은 벽돌 쌓이듯 단계적으로 쌓여 나갈 때 진수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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