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Feb 18. 2022

통장 잔고 76,510원

어제 퇴근길.


시청역 2호선 전철역 계단을 내려옵니다. 유연근무제로 4시 반 퇴근을 선택한 관계로 퇴근길이 조금은 한가합니다. 개찰구 앞까지 내려오며 전철 운행 안내도를 보는 순간, 왕십리 방향의 전철이 곧 플랫폼으로 진입한다는 표시가 떠있습니다. 후다닥 휴대폰 속 교통카드를 찍고 뛰어서 플랫폼으로 내려갑니다. 스크린도어 너머로 전철이 플랫폼으로 진입합니다. 가쁜 숨을 잠시 고르고 스크린 도어가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전철 안이 한가합니다. 군데군데 빈자리도 보입니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따라서 동시에 전철 출입문도 열립니다. 내리는 승객이 있어 잠시 오른쪽으로 비켜있다가 천천히 전철에 오릅니다. 전철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출입문쪽 오른쪽 좌석에 앉아 있는 여성분의 손에 쥐어져 있는 휴대폰 화면의 숫자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76,510원.


제가 거래하는 은행의 모바일 계좌 모습이기에 숫자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비어 있는 건너편 자리에 앉아 휴대폰 속 숫자의 주인을 건너다봅니다. 롱 파카에 목도리를 하고 방한용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파마는 하지 않은 생머리를 단정하게 커트한 머리에 흰색 머리카락도 간간히 섞여 있는 걸 보니 50대는 넘어 보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 연령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옷을 갖춰 입은 행색과 들고 있는 가방, 그리고 마스크 위쪽으로 보이는 눈가의 주름과 눈썹 화장 정도로 가름할 뿐입니다.


휴대폰 통장 속에 적혀 있는 76,510원의 숫자가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은행 최종 잔고치고는 너무 작은 숫자이기에 그렇습니다. 통장 잔고 숫자가 주인의 현재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그 숫자가 적힌 통장은 여러 개 통장중 하나에 속한 숫자이기를 소원해봅니다. 공과금 결제를 처리하는 계좌인데 결제 금액이 다 빠져나간 상태의 숫자일 거라고 말입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월급쟁이도 그렇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통장의 숫자 크기는 삶의 무게와 반비례합니다. 통장의 잔고 숫자가 크면 진중히 잘 살고 있음을 나타낼 것이고 숫자가 작으면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테니 말입니다. 급여일에 잠시 커진 숫자가 하루 만에 신용카드 결제비용으로 이것저것 빠져나가면 달랑 가벼운 숫자로 변해 버립니다. 다시 신용카드 빚으로 다음 급여일까지 버티게 되는 악순환의 숫자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통장 잔고 숫자 늘리기는 삶이 전쟁터임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숫자가 커질수록 비축한 무기가 많다는 것이고 다양한 최신 무기도 동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힘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이 숫자가 커지기를 소망하지만 누구에게나 커지지는 않습니다. 이 숫자를 키우기 위한 끝없는 전쟁 같은 시간들과 땀과 노력이 들어가서 숫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를 늘리기 위해 간혹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를 하기도 하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가 폭망 하는 경우도 봅니다. 크면 클수록 좋을 것이다는 상상은 온갖 부정과 권모술수를 낳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상의 숫자에 점점 올가미가 씌워집니다.


그래도 올가미는 아닐지라도 사는데 근심 걱정할 필요 없는 정도의 숫자가 되기를 모두가 바랄 겁니다. 그 바라는 숫자는 천인천색 만인만색으로 다양할 테지만 말입니다.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76,510원 숫자는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회초리가 됩니다. 혹시 아무 생각 없이 통장 숫자 줄이는데 일익을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되돌아봅니다. "없는 사람은 아끼는데 주력하고 있는 사람은 투자하는데 주력한다"라는 말도 있지만 아낄 건 아끼고 투자할 건 투자하는 지혜를 발휘해야겠습니다. 은행 잔고라는 녀석은 정답도 해답도 없는 녀석일 테지만 때로는 숫자가 아닌 금덩이로 비축해 놓을 수 도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속한 커뮤니티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