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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23. 2022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다

'살아있음'은 '스스로 움직임'을 전제로 한다. 움직이지 못하면 살아있다고 하지 않는다. 동물에 적용되는 정의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고 한 군데 정착하고 있음에도 살아있다고 한다. 살아있으면서 움직이지 못하면 '식물인간'이라고 한다. 동물과 식물을 대별하는 가장 큰 분별점이 '움직임'이다. 동물(動物)이라는 단어 자체에 움직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움직인다는 것은 방향성을 갖는다.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 앞으로나 뒤쪽으로 또는 좌나 우로 좌표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앞과 뒤의 개념은 다세포 생물이 갖는 근본적 방향 감각이다. 반드시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다. 태생적으로 앞과 뒤가 정해진다. 머리가 향하는 방향이 앞이고 꼬리가 있는 방향이 뒤가 된다. 인간은 직립하여 앞과 뒤의 개념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듯 하지만 시선의 방향으로 원초적 앞과 뒤를 가려낸다. 상체를 일으켜 세워 더 멀리 볼 수 있는 기능을 획득하면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일거양득을 얻었다.  직립하여 앞을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장점이 동물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였다.


한편 위와 아래의 개념은 고생대 데본기 때 물에서 대지로 올라온 양서류로부터 기인한다. 땅에서는 물속과 달리 중력이 작용한다. 물속은 무중력 상태와 동일하다. 중력은 우주의 근본 힘이다. 지구에서 중력은 위와 아래의 원인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현상, 과일이 떨어지는 현상 모두, 중력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중력의 강도 차이에 따라 위와 아래가 정해진다.

이 네 가지 방향, 위, 아래, 앞, 뒤를 동서남북이라 칭한다. 방향을 가리킨다. 4 요소를 규정하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이 네 요소만으로도 존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인간은 좌와 우라는 별도의 방향성을 추가해 입체화했다. 좀 더 정밀하게 위치를 확인하게 해 준다. 하지만 좌와 우는 시선의 방향 중에 일부다. 앞으로 향한 시선을 좌측으로 돌리면 되고 우측으로 돌리면 된다. 좌와 우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앞쪽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좌와 우를 만든 것이다. 좌와 우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적용한 추상의 개념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방향이 아니다. 하지만 좌와 우는 방향성을 넘어 인간사회에 선을 긋는 관념으로 진화했다. 편을 가르고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다.


존재의 위치를 좀 더 정확히 알고자 규정한 개념이 늪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는 이데올로기로 좌와 우가 작동되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좌와 우를 향한 시선이 다른 방향이 아니고 같은 방향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앞을 바라보는 같은 현상임에도 굳이 나를 고정시키고 좌와 우로 나누려고 한다. 좌도 앞이고 우도 앞이다.


그래서 더욱 힘든지도 모르겠다. 모두 앞이니 자기 것이 맞다고 우기는 현상이다. 같은 앞인데도 말이다. 좌와 우가 다름의 인정이 아니고 차이의 인정으로 고착화되는 한,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지 자명해진다. 앞과 뒤, 위와 아래라는 물리적 현상에 좌와 우라는 관념적 현상이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한다. 이는 존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며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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