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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24. 2022

소통과 불통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가 소통이다. 소통(疏通, communication)은 막힘이 없이 잘 통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잘 이해해서 오해가 없도록 하자는 뜻이다. 소통이 화두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양분되어 막혀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통의 조건은 나와 형상을 같이 하고 있는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소통이 필요하다. 다세포 생물의 근원적 본질에서 소통은 출발한다. 생물학적 소통은 죽고 사느냐의 문제다. 미토콘드리아 박테리아가 숙주 박테리아와 공생을 소통하지 못했다면 지구 상 생물은 단세포 생물만이 존재했을 터다. 이렇게 소통은 생물과 생명의 진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 DNA다. 나와 다른 존재를 본질적으로 인지하고 그 다름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 그것이 바로 소통이다.


생명현상에서도 소통이 불통이 되면 진화의 길을 걷지 못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진화이긴 하지만 환경을 극복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게 된다. 기형이 생기거나 결국은 같이 죽게 된다. 생명에 있어 세포 공생의 소통은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다. 살려면 소통을 할 수밖에 없다. 소통을 잘한 생명을 우리는 보고 있다. 지금 세상을 뒤덮고 있는 온갖 생명은 모두 소통을 최적으로 잘했기에 존재의 의미를 뽐내고 있다. 소통의 최정점에 있는 현상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소통이 낳은 다양성을 보고 있다.


인간은 이런 근원적 소통의 힘을 언어로 풀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생물학적 범위를 넘어 관념적 수사로 세상을 보는 효율성을 획득한 것이다. 생물학적 소통에는 장구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언어적 소통은 이 시간을 순간으로 바꿔 놓았다. 소통의 효율성을 최적으로 만드는 것이 대화다.

그래서 자주 만나고 대화를 많이 해야 상대방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상대방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말하기에는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이 말한 "대화는 말하는 화자의 수사학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심리학이다"라는 표현이 적용된다. 대화는 말하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 기준이다. 듣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 대화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상대방 심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살아온 모든 궤적을 담고 있다.


다른 심리, 다른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름과 차이를 알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다. 소통이라는 것이 그래서 등장한다.


하지만 소통이 불통이 되는 현장을 수없이 목도한다. 소통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지만 서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서는 타협이 필요하다. 타협은 조금씩 물러나는 양보다. 타협과 양보는 소통의 기본이다. 우리 사회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대를 보는 시각이 문제다. 상대방이 하는 일과 행동을 모두 문제의식으로 바라본다. 그러면 영원히 소통할 수 없다. 말하면 할수록 오해만 쌓인다.


상대를 인정하자. 상대가 없으면 나의 존재도 무의미하다는 기존 전제를 인정하자. 상대는 죽여 없애고 눌러 억압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고 너로 인하여 내가 있음에 대한 고마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손을 잡게 되고 포옹을 하게 되고 서로 격려하게 된다. 증오의 눈빛이 아니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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