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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12. 2022

코로나 앞에 무력한 종교

코로나 19는 아직도 우리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다. 이젠 인구의 1/3이 항체 보유자가 되어 있다. 코로나가 다녀간 사람은 속 편하게 활동을 하고 아직 코로나가 다녀가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더 불안하여 마음 졸이는 형국이 되었다. 엔데믹을 선언해도 괜찮을 듯 한 분위기이지만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은 관계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코로나를 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식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치사율 높은 초기 상황을 방역과 백신으로 어렵지만 잘 지나왔고 이젠 코로나에 걸려도 백신 접종을 했던 사람은 감기나 몸살 정도의 증상을 앓고 지나가고 있다. 연세가 많아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거나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코로나에 걸려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가 불안에서 공포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공포(恐怖, fear)는 두렵고 무섭다는 것인데 반드시 대상이 있다. 사자와 호랑이, 뱀일 수 도 있고 보이지 않지만 헛것에 해당하는 귀신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불안(不安, anxiety)은 두렵고 무서운데 대상이 없다. 막연한 두려움이다. 불안은 언제 닥칠지, 어디서 다가올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에서 오는 현상이다.


공포는 대상이 없어지면 사라진다. 눈앞에 뱀이 나타났다면 발걸음이 얼어붙었다가 뱀이 사라지면 공포도 사라진다. 반면 불안은 어디서 불안의 원인이 등장할지 모르니 계속 긴장하는 상태다. 공포는 실제이고 불안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끝까지 따라붙는 악령으로 변한다. 계속해서 증폭된다. 정신병과 스트레스의 근원으로 작동한다.


코로나가 눈에 보이지 않던 불안에서 눈에 보이는 공포로 바뀌었다는 것은 코로나를 없앨 수는 없지만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2년이 넘게 코로나 확산 과정과 변이 상황 등을 지켜보면서 통제 가능한 바이러스가 되고 있음에 조금이나마 안도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가 불안에서 공포의 단계로 격하된 데에는 코로나에 대한 지식이 한 몫했다. 지식이 인류를 구했다. mRNA 백신 개발이 그렇고 여러 치료제가 그렇다. 과학적 지식이 인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열쇠임을 증명한 것이다. 아느냐 모르느냐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를 결정한다. 아무리 유일신을 향해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봐야 바이러스가 피해 가지 않는다. 바이러스와 종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코로나가 증명해 버렸다. 코로나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으로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신이다. 

물론 코로나 시국에 종교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불안한 마음을 평정심을 갖도록 했고 의례(儀禮, ritual)를 통해 행동을 자제시켜 왔다. 종교 본연의 임무인 불확실성으로부터의 탈출과 그로 인한 안심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일익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코로나가 심리적 불안의 모습에서 통제가능한 대상으로 모양을 바꾸게 된 데에는 종교의 역할은 없었다. 


종교는 종교의 역할이 있고 과학기술은 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한다. 둘의 영역이 다름에도 이를 섞어서 역할을 모호하게 만들어 한쪽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코로나 변이는 앞으로 또 어떻게 등장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가 힘을 갖는다. 불확실을 안심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대체재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모든 불확실성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종교의 생명력은 영원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코로나는 없어지지 않는다. 소독약 뿌리고 백신 맞고 마스크 쓰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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