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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13. 2022

메타버스 속의 아바타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나(self)라는 실체는 무엇인가? 이 몸뚱이? 물질 존재로서의 실체를 나라고 하는가? 남이 보는 나는 그럴 수 있는데 내가 보는 나도 이 몸뚱이를 나라고 규정하고 있나? 그럼 몸뚱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식체계를 합치면 좀 더 나라는 규정에 다가갈 수 있나? 대충 그렇다고 치자. 머리 아프니까.


이 고민은 인류의 수많은 현인들이, 인류의 종속 기간만큼 고민해온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선자들이 고민해서 내놓은 정의들을 습득하면 대강 나에 대한 정의와 개념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이유는 다른 '내'가 존재하는 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변한다. 그것이 세계(世界)다. 시간 관계가 세(世)고 공간관계가 계(界)다. 그런데 시간은 변하는데 공간은 변하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 영화관이 그렇고 우리의 브레인이 만들어내는 생각이 그렇다. 반면에 시간은 변하지 않는데 공간이 변하는 곳이 있을까? 물질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입자는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없는데 우리는 물질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입자가 아닌 파동만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든 신과 이데아다.


그런데 두개골에 갇힌 자아가 공간을 벗어나 영역을 확장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메타버스의 세계다. 메타버스는 가상세계다. 가상세계에 아바타를 만들어 가상세계 속에서 자기 인양 행동을 하게 한다. 메타버스 속의 내 아바타는 나인가? 내가 아닌가?


아직은 메타버스 내에서 싸이월드 수준의 이차원적 아바타가 득세하는 수준이지만 이미 3D를 입힌 아바타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조금씩 더 아바타가 정교해질수록 아바타에 입혀지는 자아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참 오묘한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실제 세계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가 어렵지만 메타버스 세계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하나하나 규정할 수 있고 '나'라는 아바타를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물질세계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없는 상황을 설정할 수 없다. 물질세계에서 자아가 없는 상태는 정신분열 상태일 때뿐이다. 아니면 죽음의 상태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두 상태 모두 자아를 인식할 수 없다. 즉 정신분열 상태나 죽음의 상태는 무의미한 상태다. 물질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존재의 상태로 있으면서도 자아를 규정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자아의 상태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상황이 있다.

바로 "타인이 바라보는 나"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고 설명하느냐가 곧 내 모습이고 나의 자아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이 티끌처럼 끼여있다고 하지만 남이 보는 나의 모습이 결국은 자아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힘들지만 타인을 보는 것은 그렇게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 


타인의 시선은 곧 나의 거울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고 특히 자주 만나고 보는 사람들에게 잘해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을 통해 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의 아바타 세계는 내가 볼 수 없는 내 모습을 아바타에 덧입히고 덧씌우는 과정이다.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메타버스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물질세계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를 만들 수 있고 그 존재를 나로 규정할 수 도 있다.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탈출구다. 메타버스가 타임머신이 됐다.


이제는 나라는 자아를 몸뚱이 하나로 규정하지 않아도 된다. 메타버스 속에서 수없이 많은 아바타를 만들어 나로 상정할 수 있다. 다중 성격의 아바타가 메타버스 공간에서 '나'의 역할을 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는지를 아는 순간, 새로운 지각이 열리고 새로운 자아를 보고 새로운 세계상을 열 수 있다. 세상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급변하고 있는데 물질만능의 주식과 아파트와 땅에 더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이라도 하고 주변을 둘러볼 일이다. 하다못해 메타버스 속에 가상의 땅을 사고 상점을 분양받을 수 있는지 들여다볼 일이다. 메타버스 속의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테니 산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고민해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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