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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15. 2022

트집

트집. 공연히 남의 조그만 흠집을 들추어 불평을 하거나 말썽을 부린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트집 잡는데 익숙하다. 트집 잡는다는 소리는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흠집 내어 비난하는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저질 사회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비난과 비평을 구분하듯이 트집과 지적도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비평과 지적의 탈을 쓴 비난과 트집을 쏟아낸다. 지적(知的) 허영이자 허세의 표현이다. 반대를 해야 똑똑해 보이고, 있어 보인다는 착각이다. 상황이야 어떻게 되었든 일단 반대하고 트집 잡고 비난하며 시작한다. 치졸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트집과 비난의 민낯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이해의 부재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음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북악산 법흥사 절터 초석에 누가 앉았네" 하는 쓸데없는 논란거리만 해도 그렇다. 초석에 앉았다는 게 그렇게 몹쓸 일인가? 문화재(문화유산이라고 표기한다더만)에 대한 몰이해 로까지 번져 갑론을박할 일인가 말이다. 그렇게 할 일들이 없는가? 누구를 지지하고 안하고의 정치적 취향을 떠나서 하는 말이다.


설사 초석이 아니라 불상이 있었는데 부처님 무릎에 앉아 쉬어간들, 부처님께서는 "잘 쉬고 가시게. 내 무릎은 피곤하고 힘든 사람 쉬어가라고 있는 거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부처님께서는 기꺼이 무릎을 내주셨을게 틀림없다.

본질을 보지 못하면 허깨비만 보고 그저 허깨비 놀이만 하게 된다. 본질은 뒷전으로 가고 엉뚱한 것이 표면으로 떠올라 그 엉뚱한 놈만 쫓아간다. 본질이 없어졌으니 이젠 본질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어 허상을 씌우고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까지 가면 그저 진흙탕 싸움만이 남는다. 이젠 죽기 살기다.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 저 놈 죽여야 내 명분이 산다.


공작이라고 그러고 프레임 씌우기라고 한다. 저질의 사회에서 가장 잘 먹혀드는 수법이다. 이를 잘 이용하고 활용하는 게 정치판이다. 좌파와 우파라는 철 지난 이데올로기가 우리 정치판에서는 아직도 유효하고 아직도 먹히고 있다. 70-80년대에 그렇게 빨갱이 프레임을 써먹더니 아직도 때만 되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당하고도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 프레임을 거꾸로 또 써먹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너무 쉬운 상대방 죽이기 방법이었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마녀 사냥의 시대였던 중세를 지나온 지 500여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의식을 지배하는 프레임의 굴레는 벗어던지지 못했다. 의식을 바꾸는 일은 그만큼 지난하고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는 인간 본성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쉽고 빠른 길을 가고자 하는 진화의 환경 속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있는 주홍글씨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한발 더 긍정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성이라고 치부하여 외면하기에는, 돌아보면 너무 한심한 작태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쉬어갈 수 있으면, 쉬어가라고 그루터기를 내어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고, 앉아서 쉬었으면 감사한 마음에 합장 한번 하고 가면 될 일이다.


이번 주 일요일이면 부활절이고 3주 뒤면 초파일이다. 종교가 내면을 키우지 않고 외형을 키우면 벌어지는 현상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해 왔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중생과 함께 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하찮음이 훌륭함을 덮어버리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찮음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질과 트집과 비난이 판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신독 하는 일이 우선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저 봄꽃 만연한 자연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온통 꽃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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