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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0. 2022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인간은 언어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도 언어입니다. 생각은 브레인 안에서 혼자 중얼대는 inner talking입니다. 말에 따라 생각의 범위도 정해지고 표현의 정도도 정해집니다. 에스키모인들은 흰색에 대한 명칭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에스키모 인들도 부족에 따라 눈을 표현하는 단어의 수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누이트족은 눈을 표현하는 단어만 10가지가 넘고, '희다'라는 의미의 단어도 16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누나빅 이누이트 방언에는 눈이라는 단어가 53개나 되며 중부 시베리아 유픽 언어에는 눈이 쌓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40 단어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누이트족이 사용하는 눈에 대한 단어가 4개밖에 안되는데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눈에 대한 단어 개수야 어찌 되었든 눈 덮인 환경에서 눈의 색깔조차 구분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의사소통으로 발달되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단어로 구분된다는 것은 바로 죽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정확한 의사전달만이 생존을 담보하던 시절을 거쳐왔기에 현재의 언어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말과 언어가 핵심입니다. 동물과 구분 짓는 절대 명제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원초적 힘의 근원입니다. 굳이 파스칼을 끌어들여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덧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언어 자체가 인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의 어순조차 사람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어순은 문맥입니다. 단어를 나열해 놓는데 단어와 단어와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이어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법입니다. 우리 한국말의 어순은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입니다. 영어와 중국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옵니다. 이 순서가 사람의 심성까지 좌우할 수 있습니다.


말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것임과 동시에 어떤 행동을 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위험을 회피하던지, 사랑을 전하던지, 반드시 행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 행동을 하게 하는 언어를 말함에 있어 실제 행동을 하게 하는 동사의 언어적 역할은 그래서 문장의 핵심이 됩니다. 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동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나열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라는 동사가 없으면 말짱 꽝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가 됩니다.

한국말은 이 결정적 단어가 문장의 맨 뒤에 있습니다.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칭찬을 하는지 비난을 하는지는 앞에 들었던 내용과는 상관없습니다. 문장의 맨 끝을 들어야 진위를 알 수 있습니다. "매사에 너무 밝고 성격도 좋고 잘 생겼는데 좀 못생겼다." 못 생겨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 문장의 핵심입니다. 문장의 앞부분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좋은 표현은 못 생김을 무마하여 미안함을 덜고자 하는 반어적 단어의 나열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은 사람을 더 기분 나쁘게 합니다. 


사실 한국말이든 세계 어느 나라 말이든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게 맞습니다. 어순에 따라 감정의 표현의 명확성을 밝히고 시작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수 있으나 문장은 문맥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다 ~~"라는 영어식 표현도 무엇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 역시 끝까지 들어봐야 합니다. 언어라는 것이 그렇게 단적으로 규정짓고 일방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된다'라는 표현은 대화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장황 연설을 통해 말하려는 본질을 빙빙 돌려가며 시간을 때우다 말끝 머리에서 결론을 이야기하는 말하는 수법을 지적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충 듣고 나름대로 대화의 결론을 미리 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의 속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로 이견을 담아버렸습니다.


대화란 서로 말하기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혼자 아무리 떠들어봐야 허공의 메아리일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배려한 간결한 말하기가 필요하고 듣는 사람은 말을 끝까지 듣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배려와 여유가 없으면 대화는 산으로 가고 감정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대화법이 바로 배려와 여유의 공간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대화는 '말하는 사람의 수사학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심리학'이라고 강원국 작가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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