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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9. 2022

여기 살았다(hier wohnte)

살면서 왠지 찝찝하고 불편한 것이 계륵처럼 걸려있을 때가 있다. 그 찝찝함이 무엇인지 확 드러나거나 손에 잡히지 않으니 계속 집착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기분 나쁘고 그런 것도 아니다. 뭔지 모를, 개운치 않은 불쾌감이 가슴 한편을 계속 지배한다. 그게 뭘까? 찝찝함의 근원이 뭘까?


세상 살면서 항상 밝을 수 없고 항상 맑을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눈앞에 닥치는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고 편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심지어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부터 출근하는 것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쓰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예측할 수 없는 문제의 초입에 마주하기라도 하면 불안이 엄습한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이미 그 불안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찝찝함의 원인은 바로 불안이다. 결정론적 확률이 아니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정성의 확률이기에 갖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이다. 그래서 불안은 공포와 다르다. 공포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공포의 대상이 사라지면 공포도 역시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막연한 불안이다. 언제 어떻게 덮쳐올지 알 수 없고 어떻게 빠져나갈지 알 수 없는 게 불안이다. 그래서 불편하다. 찝찝함과 불편은 예측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불안의 내적 표현이다. 


찝찝함과 불안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드러내야 한다. 뭔지 모르지만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는 녀석을 겉으로 돌출시켜야 한다. 안에 있는 것을 들어서 내놓고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한다. 드러내 말하고 드러내 쓰고 드러내 표현해야 한다. 드러내 놓아야 편해진다. 찝찝한 것이 문제였는지 아닌지,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진짜 문제였는지 아닌지는 드러내 놓고 나면 알게 된다. 찝찝함과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혼자 끙끙대느라 점점 수렁에 빠져들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드러내면 해결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고 상의하기가 녹녹지 않다. 불안이 곧 나의 치부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전전긍긍하게 된다.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고 괜히 친구에게 이야기했다가는 핀잔을 들을 것 같고, 업무에 대해 팀원들에게 털어놨다가는 일 못하는 상사로 찍힐 것 같고,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백가지도 넘게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찝찝함과 불안과 계륵의 해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드러내는 용기 말이다. 쉽지 않다. 드러낸다는 것은 스톨퍼스타인(stolpersteine)같은 표식을 가슴에 박는 일이다. 걸려 넘어져 회상하게 하고 잊지 않게 하는 방법이지만 드러내고 고백하는 일이다. 스톨퍼스타인은 "여기 살았다"라고 천명하는 드러냄의 각인이다.


드러낼 때 진실을 인정받는다.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 집단지성과 집단이성이 살아난다. 그렇게 찝찝함과 불안과 상처는 그 드러냄 안에서 융화되고 재창조된다. '여기 살았다'의 알림은 작지만 큰 울림이다. 드러냄의 미학이다. 찝찝함을 벗어던지고 다시 힘을 얻는 이정표다. 




스톨퍼슈타인(stolpersteine) : 걸려 넘어지다(stolpern) + 돌(steine)의 합성어로 '걸림돌'이다. 독일에서 나치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살았던 장소에 설치한 가로 세로 10cm의 작은 추모 동판이다. 건물벽에 붙여진 동판이 아니고 길바닥 보도블록 사이에 박아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이것 때문에 발을 헛디디길 바란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억해보길 바란다"라고 1992년부터 이 추모동판 설치를 하고 있는 독일의 예술가 귄터 뎀니히( gunter demnig)는 말했다.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 전역을 넘어 세계 20개국에 지금도 설치가 되고 있으며 2019년 7만 5천 개가 넘었다. 스톨퍼슈타인에는 희생자의 이름, 출생일, 사망일 등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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