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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2. 2022

'산다'는 것은 '관계의 방정식'을 푸는 일이다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은 참으로 많이 던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지금 살고 있는 행태가 맞는 것인지? 등에 대해 묻곤 한다. 바로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는 것이다. 고갱이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렸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통해 던진 질문도 맥을 같이 한다.  결국 '나'를 규정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나의 좌표를 확인해야 다음 행보를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좌표가 뜰 때까지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규정하고 알아챈 사람은 인류 이래 몇 명 되지 않는다. 현존 인류가 70억 명 이상이 살고 있음에도 이 산다는 존재의 질문에 명쾌히 답을 얻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질문이 어려워서 그런가? 논법에 맞지 않는 질문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에 해답을 갖기 힘든 이유는 존재 자체가 착각이기 때문이다. 뚱딴지같은 결론이지만 이 의문에 방정식을 들이대고 수식으로 풀어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한 방정식으로 공간과 시간의 관계가 존재임을 정의하고 증명했다.


끙끙거리며 상상만으로 존재를 규정하고 찾는 것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수식으로 한번 따라가 보는 것이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지름길이다. 천재의 어깨 위에서 바라보면 천재의 시선으로 본 존재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은 관계의 학문이다. 4차원 시공과 물질 에너지와의 관계, 시공의 곡률과 물질 에너지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방정식이다. 시공은 물질의 중력에 의해 휘어지고 이는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인다.

고갱 / '우리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1897년

상대적으로 보는 관찰자의 자아는 인간이 만들어낸 착각의 환상이다. 우주만물은 관계에 의해 존재하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누군가, 바로 나의 존재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인간 뇌의 진화과정에서 생존확률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였기에 환상이 존재로 탈바꿈을 해버렸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져지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현상적 존재다. 하지만 과연 오감을 통해 만나는 것이 진실일까?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조차 브레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지금 세상을 밝히고 있는 저 햇빛은 태양을 떠난 지 8분 20초가 지난 빛을 보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화면의 흰 바탕은 1/100만 초 전의 화면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과거의 현상이 눈의 망막을 통해 신경망을 타고 들어가 브레인 1차 시각 피질과 연합 영역을 거쳐 대뇌피질에 전자기적 작용으로 전달되면 전전두엽은 이 정보들을 종합하여 바깥세상을 해석해 낸다. 브레인의 해석이 세상을 보는 창이 된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사람마다 다른 이유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데로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과거를 보는 순간만이 있음에도 이것을 지금이라고 믿는 착각만이 있을 뿐이다. 우주에는 무수한 현재가 존재하지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의 착각에 빠져있을 뿐이다. 세상은 변한다고 생각한다. 시공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지만 이 관계의 연속을 시간의 변화로 인식하고 흘러간다고 표현하면서 발생하는 오류일 뿐이다.


'산다'는 것은 관계의 변화율이 있을 뿐이다. 나와 사물과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 모든 것이 바로 시공의 관계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산다는 것'의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관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별거 아닌 것이 된다. 관계를 잘 맺고 끊으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 왼쪽 변수의 4차원 매트릭스처럼 끊임없이 울렁이는 시공의 곡률과 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방정식 오른쪽 항의 물질 에너지의 변환으로 천칭의 균형처럼 조화를 이루는 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파고를 타고 일렁이는 방정식의 세계다. 일희일비할 필요 없이 꾸준히 걸어가는 둘레길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꽃도 보이고 향기도 전해지는 일, 그것이 산다는 것의 정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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