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r 24. 2020

햇살의 고문

보이지 않는 창살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내리비칩니다. 저 햇살 아래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벽이 있는 것도, 창살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섣불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합니다. 해가 진 어둠 속에 초승달 어스름이라도 기대어 조심스럽게 나가봐야 먹먹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풀릴까요?


찬란해서 더욱 슬프고 찬란해서 더욱 나가고 싶은 그런 나날들입니다. 차라리 비가 억수로 내리고 바람도 불고 천둥 번개라도 치면 핑계 삼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텐데 무심한 햇살은 창문을 넘어 들어와 책상 위에 까지 다가와 유혹을 합니다.


"나가 봐!" "왜 못 나가는 건데" "뭐가 무서운데" "바보 아니야? 쏟아지는 햇살을 그저 즐기면 돼" "마스크 쓰고 나가갔다 돌아올 땐 손도 씻고 샤워도 하면 되는 거잖아"


당연한 유혹이고 욕망일 테지만 참아내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 가리고 조심하면 바이러스가 돌아다닐 곳이 없어져 하루라도 빨리 소멸될 테지요. 희망을 갖고 2주일을 버텨보기로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시간이 약'인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곧 저 바깥의 찬란한 햇살을 받은 꽃들이 만개하는 시간이 오는 것도 자연의 흐름이라는 시간 속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만들어낸 곡률을 따라 시간이 배열되어 계절이 만들어지고 그 계절의 온도에 적응한 생명들이 각각 자기의 시간에 맞춰 생명의 기지개를 켭니다.

그렇게 자연의 흐름을 인간은 '시간'이라 칭하고 숫자를 부여해 못을 박아 놓습니다. 감히 어쩌지 못하는 부동의 진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난밤이 해가 안 보여 밤이라 칭하는 것이지만 그 밤의 뒤에 해가 존재했던 것처럼, 시선의 눈높이에 따라 시간과 존재는 천차만별로 그 의미를 담아냅니다.


시선의 확장과 다양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구름 너머의 밝음을 보고 저 찬란한 햇살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말입니다.


구름에 가렸다고 그 위의 밝음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잠시 가려져 안 보일 뿐입니다. 역시 시간의 관점입니다. 긴 호흡으로 회색빛과 밝음을 같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다면 짧은 시간의 흐림은 감내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차피 걷힐 구름이기에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밝음을 향해 가면 됩니다. 밝다는 것은 긍정의 표상입니다. 밝음은 에너지의 근원인 빛의 형태로 지구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지구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원천입니다. 물론 밤의 정령은 밝음을 더욱 밝게 만드는 쉼의 공간 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어느 하나, 티클 하나라도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존재 이유입니다. 내가 존재하듯, 세상의 이름 모를 잡풀 하나에서부터 더위와 추위, 밤과 낮의 구분에 까지 원래 그대로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를 스스로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존재한다는 자체 만으로도 경이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존재의 이유만으로도 구름 뒤에 숨은 찬란한 태양의 햇살을 두 눈 가득 담을 수 있고 바깥의 차가움 뒤에 숨은 상큼한 봄바람의 기운까지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리의 브레인에서 해석하는 세상 임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다른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다만 언어를 통해 의미의 場에 갇힌 이유로, 똑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태양이라는 실체를 태양이라 칭하고 바람이라는 비존재를 바람이라 칭하고 따뜻함이라는 체감을 따뜻함이라 칭하기로 약속하고 받아들였기에 언어는 곧 세상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사소통과 언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들도 같은 종끼리는 소리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비존재의 상징을 표현해 냅니다. 0이라는 숫자의 표현도 그렇고 무한대라는 크기의 표현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어만 이야기해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진화인 것입니다.  찬란히 비추이는 아침햇살이 코로나에 갇혀버린 군상들의 아침을 더욱 빛나게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잠시 차 한잔의 여유와 창가의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본래 모습을 훔쳐볼 수 있습니다. 태양빛이 좀 더 강렬해져 대지를 덥히고 대기를 데워 활기로 부활할 겁니다. 태양은 원래 그런 존재이고 그 에너지인 광자 또한 원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역할을 하도록 결정지어져 있습니다. 우주 역사 138억 년 중 태양이 생긴 지 50억 년이 지났고 앞으로 남은 일생이 50억 년 정도입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이지만 그렇게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는 게 또한 태양의 운명입니다. 태양의 주위를 따라다니는 지구야 앞으로 50 억년 후면 적색거성으로 변한 태양의 품으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상상 속의 시간처럼 보이는 억년 단위 때문에 고민하고 비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잘 살아내느냐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일들을 적극적이고 밝고 맑게 만들어내어 삶의 기쁨으로 승화시켜 인지할 것인가에 집중하면 됩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 흥미롭고, 알 수 없기에 더 알고 싶어 지고, 보일락 말락 하기에 더 보고 싶은 것. 바로 인간만이 유일하게 미래라는 알 수 없는 시간 정의를 하고 목적을 세우고 이루어내는 원천으로 작동합니다. 오늘은 어떤 일들이 저 찬란한 햇살 속에 숨어 있어, 숨바꼭질하듯 찾아내는 희열을 느낄까요? 알 수 없기에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부딪혀보고 맞서 보아야겠습니다. 그깟 코로나 바이러스는 찬란한 햇살에 태워 없앨 존재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미명 속에 숨은 춘분의 과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