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r 25. 2020

꽃핌과 DNA의 적응

매년 이맘때면 회사에서 항상 해오던 행사가 있습니다. 봄이라는 계절과 이 계절에 들어 있는 식목일이라는 특별한 날을 접목한 '꽃씨 나눠주기'입니다. 온 산하에 지천으로 생명이 움트리만 집안으로 그 초록을 가져가고 정성을 들여 키우게 하는 '선한 심성'을 자극하는 행사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하여 20여 년 넘게 진행되어온 이 행사마저 취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새싹의 움틈까지 지켜보지 못하게 막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식목일 때 나눠준 재배 키트를 키우던 창가의 화분이 사라진 후 화분에 물 주는 일상을 없애버렸더군요. 창가에 화분 키트 서너 개를 올려놓고 새싹이 자라고 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는 현상을 보느라 매일 물을 주었었는데 가을이 지난 어느 날 사무실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한꺼번에 치우신 이후 화분에 물 주는 일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사무실에 다른 큰 화분에 행운목도 있고 유도화 나무도 있고 난도 있고 여러 개가 있습니다만 제가 씨앗을 심고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심지 않은 화분에는 물을 주는데도 차별의 손길이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텀블러에 마시다 남은 물을 부어주는 정도밖에 안 하고 있더군요.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지금 바깥은 꽃의 개화가 만발하고 있습니다. 뜰앞의 하얀 목련화도 그렇고 담장 옆의 노란 개나리도 그렇습니다.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색 꽃은 이미 지고 있을 것이고 산 언덕의 진달래는 이제 연분홍색을 머금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자연은 피고 지고의 순서를 따라 색깔의 변화까지도 바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무실에는 꽃의 색깔이 전무합니다. 이 계절에 맞는 화분이 없기도 하겠지만 정성 들여 물도 주고 애정을 주었다면 행운목 나무라도 꽃을 피울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꽃대를 낼 분위기는 아닌 듯합니다. 그저 삭막한 사무실에 초록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우리는 꽃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꽃이 가지고 있는 색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꽃이 지니고 있는 향기를 기다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따뜻함을 기다리는 대명사로 꽃의 의미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모두 다 이겠죠. 꽃이 피어야 나머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과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 실내에서 키워지는 꽃들은 어떻게 봄임을 알까요? 1년 내내 피는 꽃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바깥에 있는 나무들이야 태양볕의 길이와 온도차를 인지하고 물을 끌어올릴 때와 꽃을 피울 때를 알아챌 수 있다고 하지만 사무실과 같이, 거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실내에 있는 화분의 나무들은 어떻게 꽃을 피우는 때를 아는지 궁금해집니다. 햇빛의 양도 인공조명으로 대체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나무의 DNA에 꽃 피우는 시기가 내재되어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엄동설한을 겪게 되는 외부에서는 온도 차이로 인하여 개화시기를 며칠씩 당기고 늦추기도 하지만 대개 비슷한 시기에 발화를 합니다. 햇빛의 길이와 온도에 대한 오래된 학습으로 인해, DNA에 각인되어 있는 발화 시기가 주요한 트리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수백수천 년 동안 실내에서 양육된 나무가 있다면 발화 시기를 언제든지 조절할 수 있는 DNA가 지배할 수 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물을 주고 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에 만들어질 수 없는 현상입니다.


자연에는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분명한 사실과 사건들이 있습니다. 자연에서 진화한 그대로 있음이 더욱 진가를 발휘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도 그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꽃들의 미시세계를 들여다보고 나면

자연에 피어나는 봄꽃들의 경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색깔의 아름다움과 향기의 고고함보다 꽃을 피우기까지의 DNA의 발현과 그로 인해 작동하는 햇살의 양과 온도를 감지하는 리셉터의 활동과 줄기의 물관을 타고 오르는 물의 흐름을 듣게 됩니다. 꽃잎 끝에서 끝없이 기화되는 물의 줄기를 타고 폭포수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굉음을 들어야 합니다. 색과 향기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고 인간의 눈에 비치고 코에 전해지는 현상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자연을 있게 하는 그 실재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묘하고 경이롭다는 인문학적 표현으로 언급할 뿐입니다.


양지바른 길가의 개나리 꽃 한 송이라도 쭈그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볼 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햇살의 고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