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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09. 2022

여권에 찍힌 도장들의 사연

코로나 엔데믹에 접어들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아직 해외여행을 가려면 백신 접종증명서를 반드시 소지해야 하고 해외에 나갔다 입국할 때도 현지에서 출국 48시간 전 PCR 검사를 한 음성 확인서를 지참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 입국해서도 3일 이내에 다시 PCR 검사를 하고 음성 확인을 해야 한다. 방역 규제가 아직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격리기간이 없어진 것만 해도 벽이 하나 없어진 것과 진배없다. 서류야 준비하면 되고 검사는 받으면 되지만 자기 격리는 꼼짝 못 하는 족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다녀와서 일주일씩 격리까지 해도 좋을 만큼 시간이 많은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말이다. 


어제를 기점으로 인천공항의 항공기 운항 규제도 전면 해제되면서 여름휴가를 앞두고 본격적인 해외여행 준비를 해도 좋을 시기가 된 듯하다. 이번 6월은 이미 항공기 운항 시간대들이 결정되어 당장 증편이 어렵지만 7월부터는 항공사들이 본격적으로 증편 계획들을 내놓고 운항 지역들을 확대할 예정임에 따라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를 높여도 될 듯하다.


마침 사무실 책상 서랍을 열다가 서랍 끝에 있는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 2개가 눈에 들어왔다. 여권을 보는 순간, 해외여행과 관련된 참 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맨 처음 만들었던 여권을 펴보았다. 1989년 2월 16일, 5년짜리 일반여권으로 발급받았다. 일본 규슈로의 여행이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당시에는 일본 입국 비자가 필요했던 시절이라 유효기간 3개월짜리 비자를 일본대사관에 가서 받았다. 여권 속에 찍혀 있는 비자 중에는 유독 미국 비자만 3개가 찍혀 있다. 사연이 있다.


첫 미국 비자는 1990년 1월에 받았는데 괌을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괌이 무비자 여행으로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 비자가 필요했다. 기억도 생생하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 뒤쪽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밤새 뻗치기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 비자받는 것이 거의 하늘의 별따기라 대사관 앞에서 줄 서는 것은 기본이었다. 1월 추운 겨울날, 당시 같이 여행 계획을 세웠던 선배 한 명과 같이 전날 저녁부터 줄을 서서 꼬박 밤을 새우고 대사관 문을 열자마자 비자 인터뷰를 하러 들어갔다. 26살 푸르렀던 청년이라 비자 인터뷰를 하는데 영사가 꼬치꼬치 묻는다. 그 당시만 해도 괌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는데 젊은 녀석이 여행을 간다고 하니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 든 B1 B2 관광용 미국 비자의 끝에는 수기로 Guam Only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며 줄 서서 비자를 받았는데 괌만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주다니 ㅠㅠ. 양키들에 대한 적대감이 끓어올랐지만 힘없고 빽 없는 변방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는 그저 감내해야 할 낙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1년 본토인 LA에 갈 일이 생겨 다시 대사관 앞에 줄을 서야 했다. 그래서 미국 비자가 2개가 됐고 또 하나는 비자 유효기간이 끝나서 갱신하느라 1996년에 재발급받은 10년 유효기간의 비자가 있다. 지금은 이 마저도 유효기간이 종료되고 갱신을 하지 않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2008년 말부터 미국과 비자면제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ESTA 전자여권 비자 신청으로 바뀌어 여권에 비자를 받지 않아도 되어 편해졌다.

그리고 여권을 넘기다 웃음 짓게 만드는 도장 날인들을 보게 된다. 여권 맨 뒤에 은행에서 환전을 하면 환전한 금액을 여권 뒤에 써서 확인한 도장이 있다. 얼마를 환전해서 출국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권에 1997년까지 환전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보니 90년대 후반까지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 환전한 액수 표시를 보고 여행사 인솔 가이드들이 데리고 갈 팀들의 현금 보유량을 알 수 있어 쇼핑 상점을 어디로 인도할지 지표로 삼았다는 웃지 못할 사연들도 있다.

또 하나의 도장 날인으로는 남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병역법에 의거하여 출입국 신고를 해야 하는 출국 확인 도장이다. 병역법에 의거하여 출국할 때 동사무소에 출국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출국심사대에 제출해야 했고 다녀와서도 다시 동사무소에 가서 귀국신고를 해야 했다. 귀국신고는 귀국 후 5일 이내에 하게 되어 있는데 늦게 신고하면  병역법 위반으로 경찰서 출두 명령서가 날아왔고 경찰서에 가서 해명을 해야 했다. 나도 93년도인가 인도를 다녀오면서 시간이 안 맞아서 귀국신고를 하루 넘겨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출두 명령서가 날아왔다. 당시 결혼 전이기도 해서 주민등록을 부모님이 계신 원주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출국할 때마다 원주 명륜동 사무소에 가서 출입국 신고를 해야 했다. 입국 신고를 안 한 것도 아니고 하루 늦게 했다고 경찰서에 출두하라니 열불이 났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원주경찰서를 찾아 담당 형사를 찾아가 하소연을 해봐도 "그런 사람 간혹 있어요" 정도의 반응으로 기억된다. 진술서 확인하느라 양손에 잉크를 묻혀 지장을 찍고 병역법 위반 초범자의 낙인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던 과거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부푼 요즘, 유효기간 지난 30년 전 여권을 들춰보니  그 안에 찍힌 도장들의 사연들이 참 애틋하기까지 하다. 그래 이제는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해외여행을 준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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