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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2. 2022

몸 건강과 함께 지식 건강도 챙기자

"많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교육과 학습, 훈련을 통해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을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지식의 활용도가 높은 사람이다. 얕은 지식을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하여 많이 알고 있는 듯 떠벌이는 사람을 허풍쟁이, 사기꾼이라 한다. 많이 아는듯한데 깊이가 없어 금방 밑천이 드러난다.


꼭 사기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식 앞에 판판히 넘어지고 좌절한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어언 20-40년은 족히 들 지났을 것이다. 학창 시절의 지식으로 평생을 버티고 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걷기 운동을 하고 근력운동을 한다. 그런데 정신 및 지식 강화 공부 운동을 한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학창 시절 때 배운 지식이라야 뻔하다. 상위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문제풀이식 교육으로 줄 서기를 하는 과정에 익힌 단편적 지식이 전부다. 우리 사회 학교 교육을 너무 폄하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입시교육에 편중되어 학습받아온 점은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 그 상흔의 잔재들이 우리의 지식으로 남아 있고 그 지식의 잔재들로 사회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경쟁을 해왔다. 학창 시절 때 주입한 지식의 단편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지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업데이트도 하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도 이 오래된 지식을 업데이트해서 새롭게 무장을 하고 더 나은 지식으로 교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예전 지식으로 고착화되어 있어 바꾸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다. 세뇌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발전해 가는데 우리는 과거의 지식 속에 갇혀 있음에도 갇혀 있는 줄 모른다. 동물적 감각과 본능에 따라 살아도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점심에는 뭘 먹지?" "저녁에는 소주를 마셔야 할 텐데 안주 잘하는 집 어디 없을까?" "날도 더운데 시원한 계곡이나 수영장 좋은 리조트 소개 좀 시켜줘" 정도만으로도 세상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아니 이 정도 관심과 대화를 하려면 인생을 정말 잘 살아야 가능하다. 먹고사는 생계에 쫓기면 뭘 먹을지 어디서 잘지조차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몸이 우선이다. 건강해야 잡생각도 가능하다. 신체가 건강해야 소주도 마시고 돌아다닌다. 정신을 건강하게 할 지식의 보강과 축척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정신을 챙길 여유가 없다. 몸도 시원찮다고 생각하는데 정신 챙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점점 피폐해진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가는 데로 살게 된다. 아침저녁에 잠시 운동하고 체중이 좀 줄어들면 잘 살고 있다고 자위한다. 더운 날 운동하고 와서 시원하게 샤워하고 수박 한 조각 입에 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난다.

그런데 문득 "내가 뭘 하고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뒤통수에 다가와 있을 때가 있다. 물질적인 면에서야 굶지 않고 밥 먹고 사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한 그 무엇이 엄습한다. 바로 '앎'에 대한 갈구다. 몸과 정신은 따로 노는 따로국밥이 아니고 함께 움직이고 함께 공진화하는 일심동체임에도 우리는 분리하여 생각하고 몸만 가꾸는 쪽으로 매진해왔다. 심지어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는 등, 얼마나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들을 하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지식을 쌓고 공부를 하는 정신적 강화훈련은 소홀히 한다. 일심동체의 균형이 무너져 심각한 수준임에도 알아채지 못한다. 평범함과 편함으로의 중독이다. 공부에 대한 학창 시절의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의 발현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편한 게 편한 거다"의 위안으로 지식의 창을 닫아버린다.


몸이 쇄약 해져가는 것은 금방 체험하면서 지식이 약해져 가는 것은 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공부는 학교 다닐 때만 하는 시간적 영역에 속하는 분야인가? 학자가 되고 박사가 되기 위해서만 해야 하는 게 공부인가?


우리 사회는 공부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다. 학교에서 수학 문제를 푸는 게 공부의 전부가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높이고 키우는 모든 행위가 공부임에도 우리는 그 틀을 학교에 한정시켜놓고 바라보았기에 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 


이제는 각각의 관심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한 번씩은 깊이 있게 들여다볼 일이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와 몇 시간씩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 분야가 자연과학이 되었든, 인문학 중에 미술이 되었든 음악이 되었든 말이다. 그리고 지식은 통섭(Consilience)되어야 가치를 발휘한다. 한 분야에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시각에 다른 분야의 시점도 가져올 수 있는 포용이 지식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식을 통섭하지 못하고 편협하면 오히려 고지식해질 수 있다. 품질이 좋은 고지식이 아니고 융통성이 없고 편협한 고지식이 된다. 


몸의 건강을 챙기는 것만큼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챙기는 앎의 공부를 깊게 하는 일도 같이 챙겨나가야 한다. 나는 오늘도 나의 여유시간에 어떤 책이 내 손에 들려있는지 되돌아보자. 그저 편히 쉬는데 나의 여유시간을 쓰고는 있지 않은지, 유튜브 동영상에 시시덕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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