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Aug 01. 2022

져줄 수 있는 힘과 용기

싸움이나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고 지는 상황이, 죽고 사는 현실을 반영한다. 중간이 없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는 없다는 것이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 극단의 상황. 그것이 싸움이고 전쟁이다.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살기 위해서.


그래서 전쟁은 처절하고 잔인하고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단순해진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 이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개입되지 않는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그렇게 나온다. 인간이 가장 잔인할 때는 '자기보다 힘이 센 대상과 싸울 때'라고 한다. 어떻게든 이겨서 살아야 하기에 코너에 몰린 쥐처럼 물불 안 가리고 행동하게 된다. 바로 평범한 인간의 잔인한 행동은 생존본능에서 발호된다.


싸움이나 전쟁은 드러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본질은 오직 '생존'에 방점이 찍힌다. 다른 조건은 개입하기 어렵다. 싸움과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질보다는 매일매일 전개되는 상황에서 이기고 짐만 따지게 된다. 본질은 사라지고 생존만이 생생히 상황을 이끌어간다. 전투 중에 가장 용감할 때는 "옆에 있는 동료 병사가 죽는 모습을 봤을 때"라고 한다.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가 아니고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더구나 내 동료가 죽는 모습을 봤을 때 발현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선을 넘게 하는 원동력이다. 전투 현장은 이념도 아니고 사상도 아니다. 오직 살고자 하는 욕망의 탈출구일 뿐이다. 전쟁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덧입힌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전쟁 같은 모습이긴 하지만 그렇게 정의 내려 버리면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물을 수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비가 내리고 꽃은 피고 새가 날고 아이가 태어남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세상은 맞물려 돌아가지만 반드시 차이가 따라다닌다. 그 차이가 비교를 낳고 전쟁을 낳고 감정을 낳는다. 


이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여유와 배려가 등장한다.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작동하고 져도 되는 싸움이 나온다. 감히 '싸움에서 져준다'는 것은 진 싸움이 아니라 이긴 싸움의 반어적 표현일 뿐이다. 싸움에서 져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힘도 없는 자가 싸움에 지는 것은 져주는 것이 아니고 패배다. '일부러 져주었다'는 속성은 힘을 배경에 깔고 있어야 가능하다. 


싸움을 일부러 져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힘이 있기 때문이고 굳이 상대를 제압해 추후 닥칠 자잘한 불편함을 자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기기만 해서는 상대편을 같은 커뮤니티에 수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져도 되는 요령을 체득하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이 요령을 몰라 헤매는 정치꾼들을 수없이 보고 있다. 특히 정치는 이기기만 해도 되지만 행정은 상대 의견도 수용해야 하는 절충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판에서 통용되는 해법을 국가 행정에도 적용하려니 무리가 온다. 물이 다르면 다른 해법을 적용해야 한다. 물이 잔잔하면 스노클만 있으면 되지만  파도가 높고 깊으면 스쿠버 장비가 필요한 것과 같다. 마냥 이기기만 한다고 강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져도 되는 상황을 알고 일부러 져주는 아량을 가진 자다. 천박한 강자는 그저 힘만 쓰는 무식한 놈으로 보일 뿐이다. 지고 이기는 현명한 강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