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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05. 2022

우리가 선택한 수준의 정도

갈등(葛藤)은 어디서 오는가? 어디에서 벌어지는 갈등인가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고 경계를 확실히 해야 갈등의 성질과 폭이 정해질 테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으로 범위를 좁혀보자.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양극화의 문제도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호사가들이 가장 많이 떠드는 분야이기도 하다. 오만가지 확률로 의미를 분류하고 가져다 붙이면 말이 되는 현장이기에 그렇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갈등은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잠재워 놓고 숨죽여 놓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정도로 봉합을 한다. 칡과 등나무의 뿌리를 잘라 원천봉쇄를 해야 하나 그렇게 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커져 버렸다. 갈등을 어떻게든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갈등을 숨죽이게 하고 양쪽의 양해를 얻는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야 한다. 바로 갈등을 봉합하는 극약처방의 칼로 권력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의 틀 속에서 힘을 부여해준 공인된 폭력으로 갈등을 제압해 달라는 시민의 부탁이자 위임이 권력이다. 불편하고 위법한 것을 밀어붙이는 게 권력이라고 착각하면 힘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불편을 막고 위법을 엄단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그나마 갈등을 누룰 수 있다.


지도자의 역량과 함께 움직이는 정치는 그 나라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바로미터다. 작금 우리 사회의 갈등이 오히려 조장되는 현장을 보면 남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이기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너보다 잘 났고 뛰어난데 네가 못나고 부실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천만의 말씀. 그놈이 그놈이다. "내가 안 뽑았다고?"

제주 걸어가는 늑대들 '전이수갤러리' 소장 그림

남 탓을 하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변명이자 이기심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수준이 동시에 격을 높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긴 하다. 키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며 공진화해간다. 그중에 우리 사회는 정치가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낮은 수준이 사회를 말아먹고 있어서 국격을 하향 평준화시키고 있어 문제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늘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을 교육과 학습을 통해 체득한 것이다. 만인만색이다. 사람마다 생각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과 같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지를 늘리고 잘라낸다. 선입견의 오만이다. 


사회가 공진화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틀을 벗어던져야 한다.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 도 있다는 전제를 항상 새겨야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세상을 그렇게 어울렁 더울렁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같지 않은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고집불통이 넘쳐나는 사회는 경계를 넘어가기 힘들다. 선진의 경계에 개구멍이라도 뚫기 위해서는 '있는 자'들이 정말 잘해야 한다. 잠시 멈춰서 옆에 차에 차선을 양보해줄 수 있어야 한다. 깜빡이를 켰음에도 안 끼워주면 감정만 상하게 한다. 적당히 끼워주지 않으면 보복운전이 횡횡한다. 참 애매한 '적당히'지만 사회가 굴러가는 원천이며 배려다. 작금의 세태를 보면 적당히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눈치챈다. 욕부터 나오고 팔뚝부터 나오더라도 적당히 참아야 한다. 행동이 거칠어지면 괜히 날 더운데 혈압만 오르고 건강에도 안 좋다. 어디 시원한 숲 속 계곡에 발이라도 담그고 닭백숙이라도 먹으러 가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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