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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9. 2022

역사를 바로 보는 눈

'독서의 계절'이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사용되는 가을이다. 책 읽을 때를 말하자면 굳이 가을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깥 날씨는 책 읽느라 틀어박혀 앉아있는 것보다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에 훨씬 좋다. 차라리 폭풍우 몰아치거나 눈 내려서 꼼짝달싹 못하는 시기가 책 읽기에는 더 좋은 때가 아닐까? 이유는 가져다 붙이면 되고 의미는 부여하면 된다. 꼭 그래야 하고 꼭 그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이미지를 굳혀 놓은 데에는, 너무나 좋은 날씨에 마음이 들떠 흥청망청하는 행위를 자제시키고자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아무튼 올 가을에는 코로나로 인한 바깥 외출 자제가 해제된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많은 인문학 콘서트들이 열리고 있어 관심 갖고 찾아보면 꽤 가볼 만한 행사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행사 중에 11월 7일까지 6주 동안 경복궁 집옥재를 개방하는 '2022 집옥재 작은 도서관'행사가 있다. 10월 1~9일까지는 집옥재 앞마당에서 '고궁 책방' 행사가 열려 여러 인문학 토크쇼와 클래식 공연도 열린다. 그중에 10월 7-9일까지는 '고종의 초대'라는 주제로 집옥재 앞마당에서 인문학 콘서트가 개최된다. '고종이 사랑한 생활문화' '고종이 사랑한 책' '고종이 사랑한 과학'을 주제로 각각 열린다. 물론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고궁 책방 행사의 테마가 고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고종하면 누구인가? 조선 역대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왕을 꼽으라면 선조, 인조, 고종 아닌가? 심지어 왕실의 안위만을 위해 나라를 일본에 넘긴 고종은 최고의 암군(暗君)이 아닌가? 


고종이 책을 많이 읽어 역사에 해박해 신하들의 지혜를 앞서 갔다는 것은 익히 아는 이야기이지만 이것만을 부각해 마치 똑똑하고 현명한 왕이었는데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시기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인물로 동정심을 갖게 할까 봐 심히 염려된다. 개인적으로 주자학적 학문에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나 외세를 바로 보지 못하고 세도정치의 끈을 자르지 못한 무능한 군주였음이 숨겨져서는 안 된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이 되어 여러 행사들을 준비하느라고 수고하고 있는데 인물의 행적이 왜곡될 수 있는 행사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니, 하면 안 된다.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 자리로 올라가는 미국 대사관 관저 옆 길을 '고종의 길'이라고 명명하여 2018년 개방하기도 했다. 아관파천으로 도망간 길을 자랑스럽게 '고종의 길'이라고? 고종이 그 길로 토꼈다거나 덕수궁으로 오갔다는 고증이나 실증자료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있나?) 적어도 길 이름을 명명하여 의미를 담을 때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설사 고종이 그 길을 가마 타고 갔다고 쳐도 치욕의 역사 아닌가? 한 나라의 군주가 자기 집을 버리고 외국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했던 길로 추정된다고 문패 박듯이 이름을 붙여놓았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에 알려서 치욕을 잊지 않으면 된다고? 쓰라린 발걸음을 옮겼을 고종의 피눈물 나는 심정을 잊지 않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치욕의 역사는 그렇게 기억하는 게 아니다.


아널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모든 유물은 자기가 갖고 있는 역사와 자기 나름의 삶이 있는데 그것을 들으려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얘기를 해준다"라고 했다. 관심을 갖고 보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듣는 것이지 아무한테나, 아무나 그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역사는 관심이고 디테일이고 현재에 되살아나는 환생의 기록이다. 역사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고종의 학문적 역량과 신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장점이 분명 있을 테지만 그보다 고종은 우리 민족의 최대 쓰라린 일제강점기를 막지 못한 책임은 져야 한다.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고 왕실의 안위만을 유지하려고 했던 그 무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변이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고종은 조선 역사 최악의 군주 중 으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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