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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22. 2022

조작은 진실 뒤에 숨을 수 없다

요즘 언론의 입을 통해 들리는 정치권의 소식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어가 '조작(造作)'이다. 조작(manipulate)은 "일을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며낸다 "는 뜻이다. '거짓'과 '그럴듯하게'가 방점이다. 못된 꾀로 남을 속이는 사기(詞欺)와 일맥상통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여와 야를 구분할 필요도 없고 보수와 진보를 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조작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소리다.


진영을 막론하고 사용되는 게 '조작'이라면 이것은 '전술(戰術)'로 사용되고 있다는 소리다. 전쟁에서 흔히 적의 교란을 위해 사용하는 암호의 조작이나 프로파간다의 조작이 정치판으로 유입되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작이 득세하는 이유는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작이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조차 왜곡 변조하여 조작하는 것은 하수의 조작질이다. 사실조차 조작하면 금방 탄로 난다. 고도의 조작은 사실은 건드리지 않고 진실을 살짝 비튼다. 사실은 하나지만 진실은 두 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작질에도 단수가 있는 것은 이 두 개의 진실에서 하나의 진실을 강조하는 수법을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서로 조작한 자기의 말이 진실이라고 떠벌린다. 조작이 숨는 은신처가 진실이기에 '조작된 진실'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조작질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는 유용한 전술일 수 있으나 입으로 싸우는 정치판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전쟁터에서야 상대방을 죽여버리면 상황이 끝나므로 전술이 조작되었는지 판단할 근거가 사라진다. 전쟁은 오로지 이기는 것이 목적이다. 조작을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판은 상대방을 물리적으로 죽이는 공간이 아니다. 그런 무자비한 정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정치판은 말로 싸우는 공간이다. 말은 아무리 심하게 해도, 심지어 쌍욕을 섞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상대방이 꿈쩍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설전이 난무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려 스스로 흥분하고 무너지게 만들기 위함이다. 총과 칼을 사용할 수 없고 말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니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심하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광장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저 한심하게 느낄 뿐이다.

하지만 링에 올라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하는 당사자는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하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 조작이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우기기가 성행하고 은폐하는 이유다. 시간이 정해져 있고 조직의 위계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며 윗사람의 실수조차 수습을 해야 하고 그 실수가 실수가 아님을 덮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복합적인 상황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조작'의 유혹이다. 그래서 조작에는 의도된 왜곡이 반드시 개입을 한다. 지금 상황에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조작이라는 잔머리가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의 잔머리는 아무리 잘 굴려도 어딘가 이빨 빠진 톱니바퀴가 있기 마련이다. 완벽한 조작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작의 아이디어와 흐름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이 조작의 잔머리는 누군가의 아이디어일 테고 조직의 집단 지성일 테다. 당장은 조작을 통해 상황을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잔머리 굴린 사람의 진실은 계속 묻어 둘 수가 없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잔머리의 대가가 있기도 하지만 드물다. 왜? 잔머리들은 대빵이나 조직의 수장이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감힘을 쓰느라 조작질에 관여하지만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싶으면 팽 당하는 조직의 쓴맛을 보게 된다. 잔머리들의 한계다.


조작질의 대가들도 자신이 토사구팽 당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녹취와 녹화와 기록을 하여 근거를 마련해 놓는다. 자신이 버림받을 때, 구원투수로 써먹기 위해서다. 혼자 죽을 수 없다는 경계심의 발로다. 나를 내치면 서로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경고다. 지금 TV 화면에 등장하는 정치판에서 실사례로 중계되고 있다.


사실 정치는 군집 국가 사회 최고의 꽃이다. 한 국가가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복지를 추구하는 핵심이 바로 정치력에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수준은 곧 그 나라의 수준을 보여준다. 한심하다고 외면만 할 수 없는 이유다. 나의 현실과 미래의 모습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눈 부릅뜨고 조작질을 일삼는 정치꾼들은 누구누구인지 지켜보고 반드시 다음 선거 때에는 응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씩 조금씩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놓아도 그놈이 그 놈인 정치는 판이 그렇고 물이 그렇다고 비하하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 쪽팔리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사실을 바로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팔랑귀가 되어 남들이 뭐라고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인지 다시 한번 찾아보고 확인해야 한다. 가짜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검증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와 게이트키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조작된 진실에 솔깃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 그런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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