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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21. 2022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아침 출근길.


무심코 평소 루틴대로 샤워하고 몸무게 달고 외투를 챙겨 입고 백팩을 메고 아파트 현관을 나서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현관 유리문으로 비치는 밖의 풍경이 온통 흰색이다. 밖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 지붕에도 수북이 쌓여있고 자동차 앞 창문에도 한아름 안겨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눈발이 날리고 있다.


잠시 주춤하다 집으로 다시 올라간다. 슈룹을 가지고 갈 요량이다. 이 눈발을 그냥 맞고 전철역까지 걸어갔다가는 그나마 듬성듬성한 흰머리를 완전히 눈발로 덮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슈룹을 쓰고 조심조심 아파트를 나선다.


멀리서 경비원 아저씨의 고무래 미는 소리가 서걱서걱 들린다. 신발이 빠져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많이 쌓였으니 오늘 하루 종일 눈 치우는 고단한 일이 될 것 같아 "수고 많으십니다" 한마디 건넨다. 눈 치우는 고무래 미는 소리에 아궁이에 군불 때던 할아버지의 고무래 소리가 오버랩된다. 추운 겨울, 어둑어둑한 새벽에 손주들 추울까 봐 일찍 일어나셔서 아궁이의 재를 치우실 때 구들장 밑으로 들리던 바로 그 소리와 같다. 은근히 뜨거워지는 아랫목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잠이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회상이다. 경비원 아저씨의 눈 치우는 고무래 소리는 아파트 주민들의 출근길을 좀 더 안전하게 하고 한 숨 더 자게 하는 자장가다. 재를 치우느냐 눈을 치우느냐의 상황만 다르지 소리는 동일한 역할을 한다. 소리는 수십 년의 물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현재와 맞닿아 있다. 슈룹 위로 스르르 스르르 떨어지는 눈 무게의 소리도 그렇다.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리면, 10월 마지막 날 꼭 들어야만 하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의 노래처럼, 꼭 떠오르는 시가 한 편 있다. 시에도 저작권을 붙였다면 가수 이용 못지않을 저작료를 받았을 텐데 안타깝다. 바로 오탁번의 '폭설'이라는 시다.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욕이 언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욕으로 들리기도 하고 재치의 웃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라는 도구가 언어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욕이 시로 들어옴으로써 웃음으로 치환되게 만든다. 시의 역할이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살짝 가미된 섹슈얼리즘의 본능까지 얼버무려 원초적 후끈거림을 끌고 온다. 전혀 천박하게 읽히지 않는다. 폭설에 뒤덮인 산골 동네에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와 장지문 너머 들리는 애욕의 소리는 동급이 되어버린다. 시인의 탁월한 시각적, 청각적 감성을 엿볼 수 있어서 이렇게 매년 폭설이 내리면 소환되는가 보다.


사실 도심에 살며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 눈은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광의 요소가 되긴 틀렸다. 낭만적인 심상을 떠올릴 자리에 출근길 엉금엉금 걸어야 하는 현실이 싫고 녹으면 질척대는 진창이 먼저 차지하게 됨으로써 혐오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린다. 도심에서의 눈 내리는 풍광은 딱 눈을 밟고 열 걸음 걸을 때까지만 낭만적인 듯하다.


그나마 새벽잠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놀이터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아이의 하얀 입김을 보고 미소 짓게 되고 누군가 도로변에 만들어놓은 눈 오리 10여 마리를 지나쳐오면서 흐뭇하게 한다. 불편함은 잠시 접어두고 흰 눈 쌓여 예쁜 풍광으로 변한 공원의 한켠에 발자국을 남겨볼 일이다. 그 언젠가 비료포대 썰매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던 얼얼한 엉덩이의 느낌을 되살려볼 일이다. 눈에 젖어 뻣뻣해진 장갑의 차가움을 뜨거운 체온으로 녹이던 그 시절을 떠올려볼 일이다. 


이렇게 이 아침 눈 내리는 출근길에 슈룹을 쓰고 잠시 돌아 돌아 눈을 밟아본다. 조금 늦으면 어떠리. 그 자리에 흰 눈 수북이 쌓을 수 있으니 마음의 무게는 더욱 견고해질 거다. 그래서 아침에 마주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흰색의 보도와 염화칼슘에 녹은 검은 도로의 줄무늬가 얼룩말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점처럼 움직이며 풍경을 메워주고 있는 그대에게 한 줌의 눈덩이를 만들어 던지며 추파를 보내본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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