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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26. 2022

돈이 우선인 사회

"옳은 말이군(correct). 정확해(accurate). 그런데 쓸모없군(useless)"


수많은 이론과 학설이 난무하는 경제분야를 자괴적으로 비판한 촌철살인의 문구다. 세상 어떤 분야에도 딱 하나의 정론은 없다. 수없이 검증을 거치고 논박을 통해 좀 더 나은 이론으로 거듭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런데 경제계의 이 농담 같은 한 마디가 자연과학계에서는 안 통한다. 인문 사회과학에서만 통한다.


자연과학계에서는 오직 숫자로만 말한다. 이는 어느 과학자가 검증을 해도 똑같은 답이 나와야 이론으로서, 법칙으로서, 학설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다. 실험을 할 때마다, 다른 과학자가 검증을 할 때마다 다른 결과치가 나오면 그건 사기다. 바로 폐기 처분된다.


하지만 인문과학계(나는 인문을 과학범주에 넣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한다)에서는 이 사기가 종종 득세를 하기도 한다. 검증할 방법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가설을 세워놓고 거기에 온갖 분석방법을 동원하여 검증을 하고 확률통계를 끌어들여 오차범위를 상정해 결론을 도출하고 가설을 맞고 틀림을 확인한다. 인문과학계의 검증의 과정은 '관계의 변수'를 다루는 학문이다. 변수 중에서 몇 가지를 매개변수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인문과학의 함정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자들은 자기의 오류를 바로바로 시인을 하고 수정을 해나가는 반면, 인문학자들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문학자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 바로 끝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우겨도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뒤엎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므로 맞다는 논리다. 소피스트의 궤변 같은 주장이 통하는 이유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 논리도 변하고 이론도 달라야 하는 게 인문학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이게 맞고 타인이 볼 땐 저게 맞는다. 그렇다고 서로 틀린 게 아니다. 서로 다름을 보고 있을 뿐이다. 어쩔 것인가? 인문의 관계는 그렇게 얽히고설킨 모순의 연속인 것을.


그 모순의 현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고 해설한다는 것 자체게 모순이자 어불성설이다. 제한된 조건하에서만 유용하고 가동되는 경제학 이론이라면 그렇게 인정을 하면 된다. 그게 모든 경제를 원만히 풀 수 있는 해법인양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작금의 부동산 가격 하락을 지켜보는 수많은 학자들의 시선만 봐도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누구 논리가 맞고 누구 논리가 틀리는가? 주식시장을 예측한다는 유튜브 동영상의 아귀들과 진배없다.

세계정세를 이야기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끌고 오고 반도체 하락세를 덧붙이며 코로나 때 풀인 현금의 규모를 언급하고 금리의 오름세를 가져와 증시 추세선을 그려가며 미래를 예측하고 전망한다. 모두 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맞고 틀리고는 지나고 봐야 증명이 된다. 지나고 나서 맞으며 맞는 거고 틀리면 틀린 것이 된다. 미아리 무당이나 진배없다.


경제를 전망하는 데 있어 너무나 많은 내외적인 변수들이 함께 작동하기에 벌어지는 촌극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돈이 통장에서, 증시 게시판에서 왔다 갔다 하니 정신이 없다. 내 통장만 줄어드는 것 같고 분위기 잘 타면 대박 날 듯하다. 포트폴리오 잘 짜면 그래도 이 아시리판에서 한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 바닥인 것만 같다. 이 바닥장세에 치고 나가지 않으면 회복할 기미가 없을 것만 같다. 눈멀고 귀 막는 지름길로 간다. 수많은 개미들이 절대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다.


제로섬 게임의 판에서는 누군가 잃은 돈을 누군가 가져간다. 잃은 돈의 대부분은 개미들의 몫이다. 돈이 돈을 버는 제로섬 게임에서는 버틸 수 있고 지를 수 있는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섣부르게 뛰어들었다가는 가계 탕진하는 지름길이 된다. 영끌을 해서 투자했다가 영혼을 털리는 경우를 지금 옆에서 보고 있지 않나? 


"법은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해롭다"로 했다. 명문화된 법조차 이럴지언데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확률의 주사위만이 던져지는 경제판에서는 더욱 말하면 무엇하리. 법은 평등을 유지하는 쪽으로 역할을 해야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니 평등하게 행사될 리가 없다. 눈앞에 돈다발이 왔다 갔다 하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이 심장을 뛰게 하는 돈 판에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앞에 성인군자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맹자는 "역왈인의이이의(亦曰仁義而已矣) 하필왈리(何必曰利) ;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고 양혜왕을 꾸짖었지만, 21세기, 특히 대한민국의 현재는 이익이 최고의 선이 되어 있다. "의로움을 뒤로하고 이익만을 앞에 둔다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인하고서 어버이를 버린 자 없고 의로우면서 그 군주를 뒤로 했던 자는 없다"라고 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利만 보인다.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에서도 利로 인한 암투에는 피도 눈물도 없음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공감하고 공감하기에 드라마 인기가 높은 것이다.


어떻게든 조금 더 있으면 좋은 것이 돈이다. 여기에 목을 매는 순간 올가미는 벗을 수가 없다. 내려놔야 한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순간에만 올가미를 벗을 수 있다. 쉽지 않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 일을 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는 일을 해야 한다. "지행상방(志行上方) 분복하비(分福下比) ;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라고 했다. 시선의 방향과 비교를 바르게 하면 지혜롭다고 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나의 체온을 나눠줄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자. 비록 내 손이 차가울지라도 더 차가운 손이 있다면 잡아보자. 36.5도의 두 손을 맞잡으면 73도가 되지는 않고 열평형을 이루겠지만 세상을 불태울 필요까지는 없다. 그 열평형으로 인한 따뜻한 온기가 더 오래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산다는 것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는 동면의 방법보다는, 추운 관계를 보듬어 따뜻한 난롯불로 은근히 피워내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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