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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17. 2020

기억은 항상 현재다

일상이 글로 쓰여 반도체 칩에 정보로 보관되는 이 현실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삶이 무궁무진한 확률로 살며 이 확률은 결국 랜덤 한 우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인간의 언어 표현의 한계로, 현상을 나름대로 기술한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보는 타인의 시선은 또 다른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견해가 다르다. 내 것이 맞는 것 같다"라고 아무리 우겨도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내가 어제 있던 일을 기억하고 지금 글로 표현하고 말로 서술한다고 해도 어제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너무도 자명합니다.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 것을 현재로 재해석하는 현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억은 과거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아이러니하죠.


기억은 4차원 시공간(spacetime)입니다. 인간만이 3차원 공간에 시간이 공존함을 인지한 유일한 생명입니다.

기억을 통해 상상을 만들어냅니다. 상상은 항상 기억을 바탕으로 합니다. 없던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착각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없으면 상상의 토대조차 마련할 수 없습니다. 상상은 바로 기억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지는 패치워깅(patchworking)입니다. 짜깁기 되어 과거에 없는 것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브레인에 기억이라는 狀을 만듦으로써 비로소 기억을 비교하게 되고 비교를 통해 창조를 하여 생존의 확률을 높이게 됩니다.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존되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상에 없는 상태를 사라진다고 합니다. 물질은 사라진다 하고 생명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기억은 이렇게 존재에 생명이라는 움직임을 통해서만 가능한 활동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가장 최적의 것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피하던, 도전하여 헤쳐 나가던 말입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하는데 한계에 부딪히고 이제 그 정보 보관 영역을 브레인을 떠나 외부 보관창고에 저장을 하고 있습니다. USB가 그렇고 컴퓨터 하드 디스크가 그렇고 휴대폰에 심어져 있는 전화번호가 그렇습니다. 정보가 광물로 스며든 것이 4차 산업혁명이고 AI인 것입니다.


생명과 정보와 광물? 전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이 단어들이 같이 묶여 있는 생명의 순환고리였습니다. 심지어 우리 몸속에도 광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담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뼈를 분자식으로 풀면 '수산화 인산칼슘'입니다. "별빛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을 피웠다"는 표현은 우주의 생명을 가장 잘 설명한 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우주는 전자와 양성자와 광자의 이야기다" "생명은 가속된 전자교환일 뿐이다" 역시 우주와 생명에 대한 명쾌한 통찰입니다. 제가 주말마다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박문호 박사의 '137억 년 우주의 진화'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2개월째 강의를 쉬고 있어 지식이 바닥나고 메말라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봄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현상, 모든 것이 전자교환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태초의 바다는 산성 바다였는데 암석 양이온이 녹아들어 중화시킴으로써 생명이 살 수 있는 바다로 만들었다" 살아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가슴 떨리게 전하는 공부가 있을까 합니다. 그저 신비하고 신기한 것이 아니고 모르니까 경외 로운 것이 아니고 들여다보니 보이는 현상으로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명징한 일인지요. 듣고 깨달은 것을 전할 수 있는 내공을 계속 쌓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정도가 아니라 "아! 그래. 그래서 이렇게 호흡하고 보고 느끼고 사랑을 하는구나!"를 직접 들여다볼 때까지 말입니다.


그 깨어있는 시간들의 순간을 이렇게 글 속에 녹인 지 햇수로 8년이 지나니 빅데이터가 되었습니다. 일상의 감정을 담아놓은 정보이긴 하지만 브레인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중요한 단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찮은 일상의 움직임과 아침저녁의 날씨로 채워져 있다고 하지만 8년 같은 날의 날씨 변화를 통해 기후의 변화를 알아챌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샘플의 기간이 짧아 유의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략 이 시기에는 꽃이 피었는데 3년 전부터는 하루 이틀 빨라졌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봄꽃을 보러 다니고 산행을 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있었던 감정의 변화들을 살펴보면 계절별로 진폭을 보이는 호르몬의 변화까지도 넘겨볼 수 있을 겁니다. 눈치채고 알아내는 능력은 바로 생존할 수 있는 우수한 기반인 것입니다. 아침 글이라는 외장하드에, 저장된 기억의 뉴런들을 연결해 보는 봄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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