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 안 받고 원만히 지낼 수 있을까? 돈 걱정 안 하고 살면 잘 사는 것일까? 가지고 있는 돈을 세다가 다 세지 못하고 잠들 수 있으면 행복할까?
세상의 물질로 잘 사는 정의를 내리면 많이 가진 것을 행복하다고 해도 그럭저럭 동의할만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봐서 알겠지만 물질적으로 많이 가진 놈이 꼭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도 안다. 인간이란 녀석은 참 별종이다. 완벽한 만족을 모른다. 어떻게든 끊임없이 새로운 만족을 찾아간다. 극한의 익스트림 스포츠까지 하는 사람도 있고 극단의 마약으로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종"이 되어버린 후 벌어지는 군상의 다양성중 일부다.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觀點, point of view)이 각자의 세계를 만든다. 각자가 가진 시선의 방향이 삶을 규정하고 결정하고 나아가게 한다. 그것을 성격에 적용하면 활발하다고 하고 조용하다고 하고 정치에 들이대면 보수라고 하고 진보라고 하며 MBTI에 가져다 붙이면 외향(Extraversion)적이라고 하고 내향(Introversion)적이라고 한다.
관점은 세상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이름표를 어떻게 붙이느냐가 따라 세상을 보는 방향이 달라진다. 방향이 다를 뿐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시선의 방향과 시선의 높이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오류가 개입되면 방향이 틀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관점은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 시선의 방향을 계속 한쪽으로 유지해 왔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관점의 매몰에서 고개를 들어 타인의 관점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확증편향에 휩싸여 동일 시선의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편식의 오류를 넘어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이 편견의 경계를 넘는 일이다.
관점의 변화는 정말 불현듯 다가오기도 한다. 일요일인 어제 오전 집에서 늦은 브런치를 먹으며 TV를 보는데 tvN에서 하는 '벌거벗은 세계사'를 재방송한다. 즐겨 시청하는 프로그램인데 본방 사수를 못했던 내용으로 "우주탐사의 역사와 우구개발의 미래"에 대해 경희대학교 우주탐사학과 김성수 교수가 나오셨다. 방송 내용 중에 지구돋이(Earthrise)라고 1968년 아폴로 8호에서 윌리엄 앤더스가 찍은 달의 지평선 너머로 지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소개하면서 "지구인 한 명을 제외하고 전 지구인이 담긴 사진"이라는 자막이 붙는다. (물론 아폴로 8호에는 3명의 우주인이 타고 있었다.)
자막을 보는 순간 머리가 띵 했다. 검은 바탕의 공간에 달의 지표면 너머 푸른 지구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을 수없이 많이 봤을 테지만 나는 한 번도 지구인의 관점에서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지구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그래 그 안에 지구인 한 명만 빼고 지구의 전 인간이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자 그 사진 속에서 꼬물대는 80억 명이 넘는 인간이 보이고 동물이 보이고 숲이 보이고 바다의 푸른 물이 보이고 그 물이 만들어놓은 흰색 대기의 흐름도 보인다. 칼 세이건이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에 카메라를 지구방향으로 돌려 60억 km의 거리에서 먼지만 한 지구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충격적이지만 윌리엄 엔더스가 찍은 사진은 후세의 카피라이터가 쓴 자막 한 줄로 같은 충격을 준다.
실체를 처음 접하고 갖게 되는 충격도 있지만 관점은 이렇게 개념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놀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호리지차(毫釐之差)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했다. 털끝만 한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오죽하면 성경에서까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명문화했을까? 인류 보편적인 시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에 첫발을 내디뎠던 닐 암스트롱의 떨리던 목소리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도 인류의 관점을 바꾼 일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항상 관점의 시선 방향을 레이더처럼 돌려볼 필요가 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고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 세상천지에 널려 있다. 내가 보는 것은 그저 바늘구멍만한,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을 뿐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바늘구멍을 계속 뚫어, 낙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의 창을 넓히고 관점방향의 다양성도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100년 동안 나에게 생명이 주어진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