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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02. 2023

카사노바는 최선을 다하는 바람둥이였다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냐를 관점(觀點, point of view)이라 한다. 관점은 시선의 방향이다. 어디를 바라보고 지향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사물과 실체가 다르게 보인다. 당연하다. 보고 싶은데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느냐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긍정적 마인드를 가졌네 부정적이네를 가르는 경계도 세상을 보는 마음가짐을 일컫는 것이다. 긍정적 마인드와 부정적 마인드 중에서 어떤 태도가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인지는 자명하다.


긍정적 마인드는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시도를 하게 되지만 정답이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아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단정 지어 놓으면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않게 된다.


정답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답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고 삶의 질을 결정해 버린다.


행동을 만드는 질문이 '정답이 있을 거야'라는 가정이다. 정답을 찾아 움직이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질풍노도 같은 청춘의 시절 때 유난히 이성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쉽게 사귀고 빨리 헤어지고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성 친구가 옆에 없었던 적은 안 보일 정도여서 항상 부러움을 산다. 바람둥이라고 힐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극적으로 이성에게 들이댄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란한 감언이설로 현혹시키기도 하겠지만 그 감언이설이 상대의 마음을 녹이고 느슨하게 하는 말들의 연속일 것은 틀림없다. 행동하고 움직여야 이성 친구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얌전하고 샌님 같은 친구들은 속마음이야 이성친구들을 만나고 싶겠지만 바람둥이만큼 들이대지를 못한다. 새초롬하게 속만 썩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바람둥이가 채가고 만다. 깡패들이 항상 예쁜 여자친구와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깡패들은 들이대고 보는 행동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람둥이의 화신 카사노바도 행동의 달인이었다. 베네치아를 떠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카사노바가 100명이 넘는 많은 여자를 애인으로 만들었지만 카사노바 생전에 그를 비난하거나 질투하는 여자가 없었다고 한다. 난 놈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희대의 난봉꾼으로 전설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답을 찾다 보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해소될 수 있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학교 교육은 해답이 있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다. 사지선다형이 되었든 모든 시험이 정답을 고르는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이는 사회의 지식을 가장 빠르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학습 방법이다.


그러나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오면 정답이 없는 문제가 더 많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 게 이렇게 힘들지? 에 대한 질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질문들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고 질문 자체를 해소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질문을 해소시킨다는 것은 이 질문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아야 한다. 화두처럼 나를 쫓아다니지 않고 잊어버리고 편안한 상태가 되어야 해소된다.  이를 위해서는 질문의 가정을 끊임없이 의심해봐야 한다. 


"사람은 죽는다"는 것도 사실인 듯 하지만 가정일 뿐이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는 죽었기에, 지난주에도 장례식장에 다녀왔기에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자 팩트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죽었는가? 나는 살아있는데 죽을 거라 가정했을 뿐이다. 죽어봐야 알 수 있는데 그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닥치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죽음이라는 실체를 주변 현상에서 보이는 모습을 통해 상상의 가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놓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가정을 바꿔보자. 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죽음에 대한 상상의 개념을 바꾸어서 해소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생물학적 죽음을 늦추거나 안 오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다는 가정을 하면 방법을 찾게 된다. 이미 노화는 질병으로 재평가되고 있고 인간의 평균수명도 계속 늘어가고 있다. 아직 한계수명을 늘리지는 못하는 수준이지만 평균수명이라도 길어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삶에 대한 질문의 가정을 바꾸면 정답을 찾아 해결하고 질문을 해소하는 방법조차 달라진다. 그 과정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질문을 해소할 수 있다. 움직여라. 움직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움직임은 정답이 있을 거야라는 가정을 품고 행동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움직임이 습관화가 되어 자동반응이 될 때까지 움직여야 한다. 꼼지락거리기라도 해야 한다. 굼벵이 기어가듯 느릴지라도 움직여야 한치라도 갈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명확한 실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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