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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03. 2023

번역, 직역, 의역, 오역, 왜곡

번역된 책을 손에 잡으면 역자가 누구인지 살피게 된다. 누가 번역했는지에 따라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살릴 수 도 있고 물 흐르듯 술술 읽히게 할 수 도 있다. 자연과학 분야의 책이면 역자가 관련분야 전문가인지, 같은 분야의 책을 얼마나 여러 권 번역했는지도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문학 분야의 책도 마찬가지긴 하다. 문학책에는 해당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통한 '문자의 맛'을 살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책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문 번역가들의 직역이나 의역에 대한 번역 논쟁을 들먹이며 끌어올 필요는 없다. 그것은 번역 전문가들이 치열한 논쟁을 통해 좀 더 좋은 글, 좋은 책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일 테니 말이다.


서점에 가면 뇌과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관련 외국 대가들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 관련 책들과 함께 서점의 주류 전시 도서들이다. 이런 특정 분야의 전문 번역서들을 들춰보며 용어의 한계 때문에 역자들이 고민한 흔적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새로운 분야이다 보니 책에 쓰인 전문 용어들이 생소할 때가 많다. 한글로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글은 소리글자이기에 의미와 상징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인 것은 분명하다. 한글은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글로 적을 수 있는 월등한 문자이자 익히기 쉽고 세밀한 감정을 표현하기 좋아 인문학적 글에는 탁월하지만 명확한 개념이 함축적으로 들어있는 용어로써의 단어를 만들기에는 쉽지 않다. 한글은 쉽게 풀어써야 표현이 와닿는 문장 구조다. 한자가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로 대부분의 전문용어들이 번역 단어들로 사용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번역서 한 권이 나오기까지 전문 번역작가들의 고뇌도 읽을 수 있어야 책 읽을 자격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번역서를 읽다 보면 문장의 흐름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를 간혹 만나게 된다. 바로 오역되는 부분이다. 이 오역되는 부분은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나 TV드라마 자막을 볼 때 쉽게 눈에 띄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면의 순간 흐름에서 똑같은 뉘앙스를 자막으로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오역의 현상을 통렬하게 지적한 책이 있다. 안정효의 '오역사전'이다. 안정효는 책에서 "대부분의 오역은 개별적인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를 모른다기보다는, 어떤 한 단어의 미세하거나 깊은 감각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영어 단어 하나에 대해서 우리말 뜻을 하나만 알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경제적인 방법으로 공부를 했다고 스스로 믿기가 쉽지만,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판단이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번역자들은, 단순히 사전을 찾아보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잘 알지 못하는 단어를 대충 짐작으로 꿰어 맞춰서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하지만, 남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나의 사소한 결점이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눈속임은 요령이 아니라 태만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번역에 있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논쟁은 영원한 화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일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해석의 차이이기에 그때그때 번역서의 내용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게 맞다. 원작자가 글을 쓰고 전개해 가는 의도를 완벽히 아는 것도 필요하고 언어별로 단어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고 문법 구조조차 달라서 의미를 살려 변환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상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뉘앙스의 문제와 전문용어의 부재에 따른 용어선택의 문제도 겹쳐있다. 그래서 오역이 나오고 심지어 왜곡까지 가는 것이다.


어제 조선일보 전문가 칼럼 '이한우의 간신열전'에 "은(隱)을 오역하다"라는 글이 실렸다. 최근 아들 학폭 은폐로 국가수사본부장직에 발탁되었다 하루 만에 사임한 정순신 변호사의 행태를 지적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대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 고을에는 곧게 행동하는 궁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가 아버지가 훔쳤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이에 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 당에서 곧은 사람은 이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위해 숨고(父爲子隱)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습니다(子爲父隱)"라는 문구다. 지금까지 숨을 은(隱) 자를 번역하는데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준다"라고 해석했다는 필자의 지적이다.


필자는 은(隱)이란 '숨겨주는'것이 아니라 자기가 '숨는 것'이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맞는다고 주장한다. 이때 숨는 것이란 관직을 버린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실종된 공(公)과 공신의 처신을 회복하는데 고전 오역이 얼마나 사회에 폐해를 남기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주고 있다.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오역을 넘어 사실을 왜곡하거나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시키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배운 것을 바르게 펴지 않고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는 기득권이 경계해야 할 문구가 아닌가 한다. 우리 사회 가진 자들의 민낯이 모두 한결같음은 부끄러움을 넘어 탄식을 낳게 한다.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을까? 가정에서 실종된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사회가 바로 갈 텐데 걱정뿐이다. 해결할 수 있는 수위를 넘은 것은 아닌지 생각할수록 더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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