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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21. 2023

행동하고 움직여야 늙을 틈이 없다

동갑내기 가까운 지인이 모레, 독일의 뮌헨에서 환승해서 런던으로 가는 일정의 항공권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직항이 아닌 환승으로 가는 여행은 처음인지 약간의 걱정과 설렘과 자랑이 뒤섞여 있다. 그래도 나서는 발걸음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이가 들면, 심지어 퇴직하여 은퇴하면 남는 것이 시간일 테니 여행도 많이 가고 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배낭여행을 하는 나이대가 있다고 한다. 보통 배낭여행의 주류는 20대이고 30-40대로 올라가면 그 숫자가 점점 줄다가 50-60대로 가면 가물에 콩 나듯이 희귀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해외의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와 같은 곳을 여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패키지여행을 따라다니는 수준은 더욱 아니다. 적어도 뚜벅이로 걷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하는 FIT(Free Independent Tour) 정도여야 한다.


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여행 가기가 힘들어질까? 제일 먼저는 돈이 문제다. 퇴직 후 버킷리스트로, 남미 종단을 계획하거나 자동차로 미국 대륙 횡단 정도는 하거나 쿠바의 하바나에서 시가를 입에 물고 헤밍웨이를 만나는 정도의 장황한 포부를 적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퇴직하면 수입이 없이 꼬불쳐둔 비자금이나 개인연금이든 국민연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매달 일정하게 들어오는 수입이 없고, 그나마 있는 것을 골방쥐 뒤주 쌀 빼먹듯 축내기만 하는데 여행을 간다는 계획은 사그라들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슬금슬금 여행 계획은 취소되거나 그나마 미련이 남아 있으면 가까운 동남아 정도로 눈을 돌리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일정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바뀐다. 그나마 짧은 일정이라도 가면 다행이다. 돈이 원수다.


그렇다고 너무 세속적으로 돈에 모든 핑계를 댄다는 것 또한 너무 짜치지 않은가?


사실 돈은 현실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심리적 위축이 더 큰 듯하다. 나만해도 그렇다. 해외의 웬만한 관광지는 대부분 다녔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는 가족여행으로 유럽만 10년 가까이 다녔다. 토요일 오전에 KBS에서 방영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주중 저녁에 하는 EBS의 '세계테마기행'은 추억을 회상하는 용도로 보는 정도는 된다. 정말 겁 없이 다녔다.


항공편이며 호텔, 기차 예약의 3가지는 어디를 가던지 기본 조건으로 깔아야 한다. 그런데 항공사 직원들은 항공편 좌석을 확약할 수 없다. 물론 제 돈 내고 항공권을 살 수 도 있지만 싸게 가는 대신 빈좌석이 있어야 타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다니는 항공사의 좌석은 사전에 예약 상황을 체크해 가며 일정 조절을 할 수 있지만 다른 항공사를 환승하거나 할 때는 그럴 수가 없다. 최대 난관이 여기에 있다. 오늘 지인의 페이스북에서 뮌헨에서 환승한다는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온 이유다.

재수가 없으면 공항에서 언제 탈지 모르는 다른 항공사의 항공편을 무조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행 일정이 우수수 무너진다. 예약된 호텔이며 기차며 다음 일정은 연쇄적으로 어그러진다. 이런 참극을 혼자 여행하면 다른 대안이라도 찾을 수 있지만 4명 가족이 움직이는데 이런 상황이 오면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계획된 일정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외국 항공사로 환승하여 대기할 때 내가 터득한 요령이 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환승할 때와 호주 시드니에서 골드코스트공항으로 갈 때 써먹은 수법이다. 어차피 빈 좌석이 나야 태워주는 것이라 탑승구 앞에 가면 다른 외국 항공사 직원들도 우리 가족처럼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도착하여 탑승대기를 해야 하는 것은 제1조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탑승객 탑승마감이 끝나고 최종 빈좌석을 체크할 때 카운터 직원하고 안면을 트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카운터 앞에서 최소한 1시간 정도 대기를 해야 하는데 기다리는 동안 계속 카운터 직원하고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한다.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말도 건다. "오늘 승객 많냐?" "빈좌석 몇 석이나 나올 거 같냐?"등등 묻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가서 남대문시장에서 산 전통문양 부채나 책갈피 등을 슬쩍 내민다. "부담 갖지 말라고, 별거 아니라고, 비싼 것도 아니라고"하고 건네준다. 뇌물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얼굴을 익히고 인연의 관계를 맺는 고리로써는 적당하다. 그렇게 바쁜 가운데 서로 웃고 하다 보면 나중에 카운터로 오라고 이름을 부른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겁도 없이 다녔다. 지금 다시 그렇게 가라고 하면 엄두도 안 난다. "그냥 편하게 다녀. 뭐 하러 그렇게 노심초사해 가며 가? 그건 여행이 아니고 고행이지"라는 생각이 지배한다.


나이가 들면 점점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변화다. 이런 당연함을 깨고 배낭매고 해외로 떠나는 친구는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꼰대가 되면 자기의 공간적 영역을 확장하기보다 지키려는 심리가 강해진다. 너무도 당연하다. 나이가 들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 같고 가진 것도 잃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지배한다.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놓지를 못한다. 꼰대들이 지가 편향적이 되어가고 정치적으로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보이는 것도 대표적인 공간 지킴 현상이다.


과감히 나서야 한다. 행동을 해야 한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가보지 않으면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가본 자, 해본 자 만이 다른 것도 할 수 있다. 주눅 들지 말자. 돈이 없다 하지 말자. 일단 일어나 배낭을 꺼낸다. 아우터도 꺼낸다. 그리고 모자도 챙기고 선블록크림도 넣는다. 집을 나선다. 히말라야 설산이 녹은 물을 머금은 노란색 꽃과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이 뒤덮은 중앙아시아의 마을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바닷속 산호와 거북이의 등딱지의 딱딱함도 손끝으로 느껴보자. 행동하고 움직여야 늙을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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