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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r 27. 2023

관계의 미학

세상의 존재는 관계로 그 형상을 드러낸다. 물리에서부터 인문까지 모든 것의 시작은 관계다. 관계(關係 ; relation)는 '둘 또는 그 이상이 서로 연결되어 얽혀 있는 것'을 말한다. 공간과 시간의 관계가 움직임이고 시간과 사물의 관계가 변화이며 거리와 시간 관계가 속도이고 사건과 인과 관계가 맥락이고 움직임과 방향의 관계가 의도다. 이미지와 시간의 관계가 동영상이고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가 환경이며 대상과 의식의 관계가 주관이다. 기억과 기억의 관계가 시간이고 감각과 기억의 관계가 지각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관계를 통해 특징을 가장 잘 찾아내는 것이 별명 짓기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별명이나 담임 선생님께 붙여진 별칭이 바로 관계의 드러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어려서는 대부분 외모나 행동, 이름과 연관된 애칭들이 붙여진다. 친구들에게는 유치하기까지 했던 땅콩, 까실이, 꺾돌이, 색시, 만두, 양키, 오뎅, 돌 등이 있다. 대부분 외모와 이름의 관계성을 담고 있다. 선생님들에게 붙여지는 별칭은 성격이나 행동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죄종스럽게도 미친개, 불독, 좁쌀 등등이다. 이 별명 하나가 그 사람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한다.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나 동기들이 "너 몇 반이었냐?"라고 물으면 "3반이었어", "2반이었어"라고 답변을 하면 "같은 반이었나?" 긴가민가한데 "나 좁쌀 선생님 반이었어!"라고 하면 한방에 알아듣는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도 관계를 통해서 출현했다. 감정도 사회적 관계에서 출현한 산물이다. 시기심, 이타심 모두 무인도에 혼자 있으면 감정은 필요 없다.


감정의 관계를 드러내 표현하는 수단이 말과 글과 행동이다. 말을 해야 알아듣고 제스처와 행동을 봐야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으며 글을 읽어봐야 상대의 심리상태를 알아챌 수 있다.


사회생활하면서 회사 선배들에게 당하는 것 중의 하나가 회식때하는 '야자타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직급과 계급장을 떼고 잠시 '반말을 하는 시간'이다. "어이 김상무! 너 짜식아 그러면 안돼!"라고 치고 나갔다가는 나중에 찍히는 빌미가 된다. "괜찮아 괜찮아! 야자타임인데 오늘 10분만 인정해 주게!"라고 꼬드기더라도 넘어가면 안 된다. 이 말에 넘어가서 반말 몇 마디 했다가는 감정의 퇴적층의 켜켜이 쌓여간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그래서 절대로 상대방 앞에서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거나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 설사 업무적으로라도 반대 의견을 낼 때가 있으면 기분 상하지 않게 적절한 표현의 단어들을 구사해야 한다. 부하직원들에게는 더구나 쉽지 않다. 강약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관계를 잘 유지해서 분위기도 살리고 일의 진척도 빨리 할 수 있게 한다. 상대의 단점을 직접 지적하기보다는 상대가 무엇이 부족한지, 방향이 다른지 스스로 알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스로 알아야 깨져도 왜 깨지는지 안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 될 수 있다. 결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거리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앞에 "I'm blind. please Help!"라고 써놓았을 때보다는 "It's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이라고 바꾸어 써 놓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주고 가더라는 카피라이팅의 전설이 있다. 관계를 어떻게 연결 짓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인다. 심지어 보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끌어낸다.


동네 구멍가게 앞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아저씨들 있으면 옆에서 훈수 두는 아저씨들이 더 고수인 듯 수를 잘 보는 경우가 있다. 당국자미(當局者迷) 방관자명(傍觀者明)이다. 장기에서 이기고자 집착하는 게임 당사자와는 다르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훨씬 객관적이고 초연하게 형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이러한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관계는 절체절명의 명제다. 물리학적인 관계의 이해보다는 인문학적 사람관계에 더 민감하고 예민한 이유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가 되물어야 한다. 혹시라도 나로 인해 마음 상 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말이다. 모든 이에게 다 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할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다. 그 경계 안의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게 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하는 일, 그것이 세상을 잘 사는 길이며 방법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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