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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04. 2023

춘흥(春興)도 언어에서 나온다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언어사(言語史)다. 감정, 의식, 지각, 생각의 바탕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말이 동물과 인간을 갈라놓았다.


생각은 브레인 속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감정은 생각을 구성하는 단어로부터 우러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가슴도 뜨거워지고 심장도 콩닥콩닥 뛴다. 흰색 '벚꽃'의 은은함이 사랑이라는 단어와 엮여야 춘흥이 배가된다. 봄꽃과 관계없는 '쓰레기' '공해'등을 떠올려봐야 봄냄새를 맡을 수 조차 없다. 단어 하나, 언어의 순서로 인해 감정이 만들어지고 사그라든다.


언어학이 아닌 것이 없다. 과학이 그렇고 종교도 그렇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역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지만 역사 이전은 맞을지 모르지만 언어 이후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맞다. 존재로 상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로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언어다. 생각 자체가 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뭘 해야 하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언어다. 양치를 해야지, 샤워를 해야지,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무의식적으로 눈이 가는 것조차 생각의 부산물로 이어지는 행동일 뿐이다. 움직임이 곧 언어다. 제스처를 통한 소통도 의사전달의 수단일 수 있으나 말과 글을 통한 전달만큼 파워풀하지 못하다. 호모사피엔스가 발달시킨 특별한 능력이다.


언어의 정교함은 토씨 하나 변형에도 반응한다. 본말에 따라붙는 조사(助詞) 하나에도 감정이 달라진다. 말과 언어가 얼마나 예민한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예를 들어보자. 간단히 "봄날은 간다"와 "봄날이 간다"를 놓고 보자.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봄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은'과 '이'가 가진 주격조사 하나가 뉘앙스와 어감의 미묘한 차이를 이끈다. "봄날은 간다"는 표현은 주체가 봄날이다. 봄이 온 듯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봄은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가버리는 주체다.


하지만 "봄날이 간다"는 표현은 객체가 보는 봄날이다. 봄이 있는데 바라보니 꽃도 지고 기온도 올라가고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본 표현이다. 여기서 봄날은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봄의 모습이다.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 목련꽃이 처절히 지닌 모습을 바라보는 아쉬움이 배어있다.


감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도 언어이지만 실증과 증명과 실험의 세계인 과학에서도 언어는 철저한 힘을 발휘한다. 과학이 곧 언어다. 과학은 용어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애매모호하고 흐리멍덩한 용어로는 정교한 과학의 결과물을 도출할 수 없다. 그래서 숫자는 철저한 과학의 언어다. 언어의 표현형이 달라 의사소통이 안돼도 숫자로 결과를 보여주면 깔끔하게 이해가 된다. 실험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현상조차도 이름을 붙여야 현상이 존재가 된다. 이름을 붙인 다음에야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된다. 그것이 과학의 세계다.


강연자 김창옥 씨도 강연 중에 '도'와 '서'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적이 있다. 정말도 좋아하면 '~도"가 나온다고 한다. 좋아하기에 '힘들어'하고 싶고 '돈이 없어' 사주고 싶고 '무리를 해서라' 도와주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해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서"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아 안 했다" "피곤해 안된다" "돈이 없어 못 샀다"라고 말이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표현은 그래서 언어학의 진리다. 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토씨 하나에도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하물며 개념을 함축해서 담고 있는 명사 하나하나 단어의 사용의 선별은 더욱 엄중해질 수밖에 없다. 말로 망하는 정치인들을 부지기수로 보고 있지 않나? 인간쓰레기와 양상군자일수록 말을 번지르하게 하지만 금방 들통난다. 그들이 쓰는 언어와 용어자체가 저급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의 용어가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가려야 한다. 말을 가려해야 하고 글을 가려 써야 한다. 문장 하나도 정제된 언어를 쓰고 내뱉고 쓰기 전에 한번 더 참고 생각한 다음에 내놓아야 한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직소를 막기 위해 신언패를 걸게 했지만 작금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언패를 스스로 걸어야 한다. 남의 의견과 주장을 막고자 하는 신언패가 아니라 스스로 조심하는 신언패는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 ;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일지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한다면 몸이 어느 곳에 있던지 편안하리라"


인문으로 읽을 것이 아니고 처세로 읽으면 이 또한 일리 있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언어는 감정의 시작점이자 행위의 끝점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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