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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24. 2023

권력이 망나니의 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사회계약론'을 통해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에게 유익하고 못 가진 자들에게 해롭다"라고 지적했다. 261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여 섬찟하다.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시민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리고자 하는 것"으로, 국가(nation) 형성 이전의 사회(social)를 말하지만 국가로 확대해석하여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 듯하다. 현대 사회는 민족국가 형태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본질은 '합법적 폭력의 독점'에 있다. 합법적 폭력을 권력이라 한다. 권력은 칼의 칼자루다. 칼자루를 쥔 자는 한 명일 수밖에 없다. 칼자루를 쥐는 경쟁에서 밀려난 자는 칼날을 쥐어 상처를 입거나 칼끝에 찔릴 수밖에 없다. 합법적 폭력이 쓰이는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쓰도록 하는가가 그래서 중요해진다. 합법적 폭력을 휘두를 사람을 고르고 고르는 이유다. 합법적 폭력이 난무하면 그 폐해가 어떠할 것인지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칼을 칼집에서 빼지 않고도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쉽지 않다. 칼을 손에 쥐어줘 봐야 그때서야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칼을 휘둘렀을 때 그 무서움을 본인도 느껴야 하는데 희열로 느끼는 순간, 칼은 망나니의 도구가 된다. 본인은 자기가 망나니가 되고 있음도 인지하지 못한다. 추진력 있고 카리스마 있다고 생각한다. 칼이 절대반지화되어 눈멀고 귀 멀게 하는지 모른다. 권력의 칼이 무서운 이유다.


칼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엄을 가져야 한다. 칼집에서 빼서 날카로움을 보여주지 않아도 날카로움이 칼집안에 있음을 모두가 안다. 칼집에서 칼을 빼서 보여주는 순간, 사람들의 판단은 제각각 반응하게 된다. 칼날이 무딘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을 칼집에서 뺀 후에는 무가 되었든 당근이 되었든 잘라볼 수밖에 없다. 휘둘러서 날카롭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뽑았다가 그냥 다시 넣으면 위신이 안 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칼을 뽑는 것은 하수다. 칼잡이 고수는 절대 먼저 칼을 뽑지 않는다.

심지어 칼을 안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조차 권력에서 나온다. 써도 되는데 안 쓰고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달콤한 유혹이고 한번 빠지면 못 나오는 마약이다. 합법적 폭력의 마력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절대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무림에는 항상 고수들이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서로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노리는 당선작탄(螳蟬鵲彈) 형국 속에서 말이다.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까치는 사마귀를 노리고 사람은 까치를 노린다. 제 앞의 먹이에 집작 하다 자신 뒤에 있는 천적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와 권력은 요망해서는 안된다. 시정잡배의 언어로 도배된 정치인의 칼은 날카로운지 무딘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욕설과 비난의 언어를 달고 살면 골목 양아치가 쓰는 사시미칼 정도의 용도밖에 안 된다. 찌르고 쑤시면 당장을 상대가 아파하겠지만 금방 치유할 수 있는 수준일 뿐이다. 칼은 감추고 있되, 촌철살인으로 무장하고 묵직한 침묵의 힘도 겸비해야 한다. 뽑아준 사람들을 대신해서 봉사해 달라고 했더니 대표로 착각하고 군림하려는 잡배들의 행태를 경계하고 감시해야 한다. 권력의 칼을 맘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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