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May 15. 2023

기억하기 위한 기록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이 문장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분야에서 회자되고 인용되는 문구이다. 책 서평에서도 가끔 볼 수 있고 예술분야 특히나 어떤 기념관을 건립할 때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사료를 언급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문장에 끼어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이 문장이 와닿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다. 기억되지 않는 현상이 우리의 일상이기에 그렇다. 주말인 어제 무얼 했는지 떠올리려 해도 한 두 가지 외에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수많은 장면과 마주 했을 텐데도 그렇다. 아니 너무 많은 사건과 정보가 스쳐갔기에 더욱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루틴화된 일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중요도를 부여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일이었다면 반드시 각인되어 또렷이 떠올랐을 터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과거의 자기 경험에 의지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기억의 범위 내에서만 사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2차원 평면에 사는 개미가 3차원 시공간에 사는 벌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기억의 범위를 확장하지 않으면 고리타분하고 자기 생각에만 갇힌 꼰대가 되어 갈 수밖에 없다.


기억의 단초를 제공하고 실마리를 풀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기록이라는 행위다. 기록(記錄, records)은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행위"다. 팩트의 저장이자 봉인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도록 가두어 놓는 행위이다. 그 수단이 글의 기록으로 주로 이루어지다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음성 녹음으로, 영상으로 그리고 반도체 칩과 같은 다양된 형태로 변형되어 존재하는 방법으로 그 태를 바꾸고 있을 뿐이다.


개인의 일상에서도 이 기록이라는 행위는 아주 유용한 기억 인출 방법이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아날로그적으로 수첩에 적기도 하고 휴대폰 메모장에 남겨두기만 해도 아주 유용한 일상의 기록물이 된다. 수첩을 들추기만 해도 기억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사슬이 된다. 단상을 짧은 메모로 남기는 것 외에도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쇼핑을 하다가 차를 어디쯤에 주차했는지 헷갈리거나 기억나지 않아 주차장을 아래 위층으로 돌아다닌 경험들이 가끔 있을 것이다. 요즘은 휴대폰으로 주차위치를 카메라로 찍어 두는 방법으로 기록의 형태를 바꾸었지만 아주 유용한 기록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기록하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다. 무한대로 정보를 저장할 수 없는 인간 브레인의 크기 제한 때문이다. 인간은 브레인 저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발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번 본 사건이나 정보를 모두 기억한다면 브레인 용량이 지금 호모사피엔스 1,400cc보다 더 커져야 했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출산을 하는 여성들의 골반크기도 커져야 하는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뇌의 크기가 더 커질 수 없다는데 봉착한다. 그래서 현생인류의 현재 모습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브레인을 쓸 수 있는 효율성을 찾은 방법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들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브레인 외부에 기억의 단초를 적어놓거나 각인해 놓는 기록을 활용하는 기막힌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이 원초적 기억저장 방법인 기록이 디지털 세계로 들어가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20조 비트(25억 기가바이트)라는 어마어마한 정보가 저장되고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보량은 매년 수십% 씩 증가하고 있는데 2025년쯤에는 전 세계 데이터 양이 175 제타바이트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빅데이터의 시대가 바로 기록의 전성시대인 것이다. 브레인 용량의 한계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잊혔던 기억과 사건들조차 데이터로 축적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기록하지 않아도 온갖 CCTV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게 된다. 디지털 세계의 흔적은 집요하게 나를 추적하여 물건을 살 것을 권유한다. 나의 행적이 감시받고 있는 듯하여 찝찝한 마음이 상존하지만  그 행적에 대한 기록 정보 사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비게이션 사용도 안되고 온라인 정보 검색도 제한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플랫폼 기업에 끌려가는 형국이다.


사실 기억을 위한 기록은 거창하지 않다. 테이블 달력 날짜에 약속된 시간과 장소를 적어 놓는 일에서부터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귀에 쏙 들어오는 대화의 문장 하나를 부리나케 써놓는 일이다. 그래서 잊지 않고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바꾸는 문구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결국 현실에서의 기록은 사람 관계를 원활히 하는 수단이고 관점을 바꾸는 도구다. 써놓은 기록은 그렇게 다시 현실로 환생하여 기억나게 하고 과거를 소환하여 지금을 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잘 기록해 놓아야 할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리듬을 잘 타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