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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2. 2023

리듬을 잘 타야 한다

내가 부러워하는 여러 사람들 중에 한 부류가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같이 통기타 밴드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 녀석이 그렇고 사회에 나와 만난 동갑내기 모임에서 거의 반 가수인 녀석이 그렇다. 또한 대학동기 중에도 한 녀석이 있다.


이들 친구들은 모두 기타를 잘 다룬다. 50대 후반의 꼰대들 중에 기타를 잘 치는 부류는 학창 시절 좀 놀았거나 교회 오빠였을 가능성이 크다. 내 친구들이 그렇다.


내가 절대 음감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기타 조율을 잘한다는 거다. 그것도 튜너도 없이 말이다. 나는 절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들어도 도레미파솔라시의 음을 어떻게 맞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이야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에 있는 튜너를 통해 기타 조율이 가능하니 이런 천국이 없다. 집에서 가끔 기타를 칠 때도 휴대폰 어플을 켜서 조율을 한다. 나에게 튜너 애플리케이션은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다. 


그렇다고 목소리로 음을 못 맞추는 음치는 아니다. 노래를 부르라면 그래도 한가닥 하는 수준은 된다. 기타를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율된 기타로 연주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밴드 모임에서 세컨드 기타를 맡아 반주를 하는 정도는 된다. 아직도 하이코드를 못 잡아 약식으로 어설프게 잡고 기타를 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박치와 음치는 아닌 것 같은데 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떤 주파수가 도고 어떤 음 높이가 레고 미인지 알지 못한다. 참 신기하다 그럼에도 노래를 하고 기타를 치니 말이다.


이 아침에 절대 음감을 들먹이는 이유는 절대 음감도 리듬이 생명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리듬은 흐름이고 조화다. 음악에 있어 리듬은 질서이고 화음이다.

그런데 아침 출근길 환승역 계단을 내려오면서 바로 앞사람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리듬이 남달라서다. 계단의 개수가 많으면 에스컬레이터처럼 쭉 계단을 놓는 것이 아니고 보통 열 계단마다 약간의 넓이에 해당하는 공간을 두고 다시 계단을 만드는 식으로 설계가 되어 있다. 열 계단마다 쉼표를 찍게 만들어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신체적 압박감을 누그러트리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파악해 인체공학적으로 그렇게 설계했을 것이다. 


출근길에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남성은 네이비블루 아우터를 입고 신발의 색깔도 맞춘 멋쟁이로 40대 초반 정도는 되는 듯했다. 환승역 계단인지라 사람이 많아 앞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밟을 수밖에 없는데 이 남성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다가 열개의 계단 중 9번째 계단을 밟지 않고 두 계단을 건너 밟는다. 본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의 눈에는 얼마나 불안해 보이는지 모른다.


뒤따라 내려갈 때 처음에는 스텝이 꼬여서 그랬나 했는데 환승역 층고가 높은 관계로 10개 계단식이 4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네 번을 다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밟지 않고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 사람 뭐지? 어떤 강박관념이나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열 번째 계단 끝마다 표식을 박아놓은 것을 밟기 싫어서 그런가?"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걸음걸이에도 리듬이 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흐름을 타고 걸어야 덜 힘들고 에너지도 덜 든다. 이 걸음걸이는 사람마다 신체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고 독특한 자기만의 걸음걸이로 정착하게 된다. 범죄학에서 범인들의 행동을 관찰할 때 사람을 특정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바로 이 걸음걸이다. CCTV에 찍힌 모습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해서 안면인식을 할 수 없게 하지만 걸음걸이는 지문처럼 한 사람의 표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걸음걸이가 두 발로 걷는 인간이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기술의 발달로 만들어진 일부이듯이, 생명에게 있어 리듬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수단으로 기능을 한다. 리듬을 탄다는 것은 반복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는 에너지가 덜 든다. 리듬이 깨지면 복구하기 위해 에너지를 써야 한다. 신체적 리듬이든 정신적 리듬이든 마찬가지다. 반복의 항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상에서 그대로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 깜박깜박 정신줄을 놓고 건망증이 발동하면 휴대폰을 손에 쥐고도 휴대폰 찾아 거실과 방을 헤매기도 한다.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매 순간, 매 시간 체험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쌩쌩하게 리드미컬하게 걷고 뛰고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고 활력을 가져오는 일이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활기찬 리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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