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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7. 2023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의 꼼수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글의 흐름을 화려하게 하기 위해 쓰는 꼼수가 있다. 한자성어를 가져다 쓴다는 것이다. 일단 자주 접해보지 않은 고전에서 용례를 꺼내고 현재의 비슷한 상황에 끼워 맞춘다. 그럴듯하다. 있어 보이게 한다. 하지만 글을 쉽게 쓰고 글의 길이를 늘이기 위한 수법일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 神'이 있는 요즘처럼 글쓰기 편한 세상은 없다. 검색창에 쓰고자 하는 글의 키워드를 검색하면 줄줄이 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보여준다. 그중에 몇 개를 열어보고 인용할만한 내용이 있으면 화면 옆에 새로운 창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하얀 화면에 글자를 처넣기 시작할 때 인용문구로 들여보낸다. chat GPT 등장으로 이런 수고조차도 필요 없는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포탈 검색창은 글 쓰는 사람들의 최대 무기고나 다름없다.


물론 글의 흐름에 맞게 적재적소에 인용문을 끼워 넣는 것조차 노하우와 경륜이 필요하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서재에 7대의 컴퓨터 화면을 켜놓고 집필을 하셨다고 한다. 이어령 선생님 글이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치밀한 수사, 번뜩이는 아이디어의 보고인 이유다.


한자성어가 글에서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대표성과 함축성에 있기 때문인듯하다. 현대인의 글 속에 있는 한자성어들은 대부분 과거 성현들의 말씀 중에 사람들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문구들은 언제든 어디든 가져다 써도 문맥에 맞으면 훌륭한 역할을 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문구라 반론을 펼 수 없다. 더구나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도 된다. 바로 한자가 갖고 있는 의미의 함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글자 하나에 세상이 담긴다. 


한자는 인간이 의사소통을 하는 문자 도구로써 개발한 최고의 전달수단인 듯하다. 그래서 2,500여 년 전 공자가 쓴 글도 현대에 그대로 전달되고 그 당시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별로 변형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를 문자로 쓸 수 있는 한글의 탁월함도 빼놓을 수 없지만 한글은 함축된 의미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는 한자에 미지치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2,000년 전 사람과 현대의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한다고 할 때 어느 정도라도 소통이 가능한 문자권의 사람들은 한자를 쓰는 사람들이 유일할 것이다. 필담으로 가능할 테니 말이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1443년 당시, 선조들을 만나 한글로 필담을 나눈다고 하면 소통이 가능할까? 아니 당시 선조께서 지금 세상에 환생을 하셔서 휴대폰 사용법을 익혀 문자를 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의사소통이 안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 같은 문자학 비전문가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읽어봐도 절반도 이해 못 하는 이유다. 똑같은 글자라고 똑같은 의미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글자의 한계인 것이다. 듣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리는 것을 그대로 글로 쓴 문자'와 '글자에 의미를 담아 이런 뜻과 개념일 때는 이렇게 쓰자고 하고 쓴 문자'와의 차이인 듯하다.


그래서 확실한 개념과 정의가 필요한 학술 용어에서 한자는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글로 학술용어를 쓰면 한 단어로 쓰기에는 애매하다. 한글 용어는 의미를 함축하기보다는 풀어서 쉽게 이해하도록 써야 맛이 산다.


그렇다면 글의 길이를 늘이고자 하는 꼼수를 동원하여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을 끌고 와보자.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너무도 당연한 문구다. 한자로 써놓고 주석을 달듯 한글을 단다. 한자가 더 있어 보이는가? 착각이다. 평소에 접해보지 않은 단어이기에 생소해서 낯설 뿐이다. 자주 접하고 익히게 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쉬워짐과 상통한다. 


한자 공부도 꾸준히 하여 눈에 익혀두면 세상 정보를 좀 더 넓게 보고 함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자공부를 고등학교 이후 손 놓고 있는지라 글자를 보면 읽을 수는 있는데 안 보고 쓰지를 못한다. 문자를 접하는 반병신인 셈이다. 영어 단어가 됐든 한자 단어가 됐든 일본어가 됐든 언어를 글로 표기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은 바깥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채널을 많이 확보하는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글자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까막눈에서 대명천지를 만나는 전환이다.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배우고 때로 익히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 했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배우는 일은 기쁜 일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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