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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8. 2023

세상을 읽는 다른 시선

오늘 아침은 정치적 우파들이 싫어한다는 언론매체의 신문을 먼저 집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좌도 우도 아닌 중도적이긴 하지만 사안에 따라 좌로 가기도 하고 우로 가기도 한다. 이걸 중도라 하나? 경계의 중간에 서있는 철새일 수 도 있고 기회주의자로 비칠 수 있다. 아니 뚜렷한 정치적 성향이 없어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류일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정치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지들 마음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길 테니 말이다.


정치색이 뚜렷한 언론매체의 신문 양쪽을 모두 넘겨보는 이유는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을 갖지 않기 위한 나름의 안배(按排) 차원이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으로 고착화되는 생각의 극단화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배려라고 자위하고 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자기 색을 보이지 않고 보호색 안에 숨고자 하는 본능의 발로일 수 도 있다. 극단으로 치달아 얼굴 붉히고 싶지 않은 쫌생이 부류들의 속좁음일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극단의 매체를 놓고 시선을 왔다 갔다 옮겨보는 재미 또한 쏠쏠함을 놓칠 수 없다. 각자 자기의 색깔과 목소리로 장식한 지면을 볼 때면 참으로 신기하다. 어쩌면 똑같은 사건을 놓고 이렇게 달리 해석하고 감정을 싣고 있는지 오히려 궁금해진다.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다르다. 사실이 모두 진실일 수는 없다. 사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은 두 개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두 개의 진실이 틀린 게 아니다. 다를 뿐이다.


사실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 같은 거다. 누군가 구름의 모양이 어떻다고 언어적으로 정의 내려주어야 그때서야 의미를 갖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언론인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사실을 기술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사실이 포장되기 시작하면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을 한다. 포장의 두께에 따라 왜곡의 수준이 드러난다.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고 하지만 개인적 편견과 시각과 논리가 이미 배어있다.

그래서 기록은 무미건조해야 하는 게 맞다. 감정이 실리는 형용사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어야 한다. 이 기록을 신문지면에서는 기사라 한다. 하지만 감정이 없는 기사를 재미없어한다. 좀 더 자극적으로 눈길을 끌만한 제목을 달고 사람의 감정을 격화시키는 형용사를 남발한다. 구독과 좋아요를 외치는 동영상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요지경의 세상이 된다. 돈의 세계에 '사실'이 함몰되어 외눈박이로 세상을 보는 현실로 전락해 버렸다.


언론인은 세상의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누가 읽어도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기록하는 게 기본 임무다. 사실에 방향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오만이다. 그래서 언론인은 누구보다도 용어 선택을 잘해야 하고 그 용어와 단어가 가진 본래의 뜻대로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중의의 뜻을 내포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반드시 용어 선택을 재고해야 한다. 일부러 중의의 단어를 선택하여 행간을 읽도록 하는 것은 사건을 기술하는 기술일 뿐이다. 독자들에게 판단을 떠넘기는 책임회피일 수 있다. 


글은 힘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요물이다. 잘 쓰면 힘이요 잘 못 쓰면 독이 된다. 문자로 기록되어 문장이 되는 순간 글자들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 사실이 되고 의미가 된다. 글에 따라서는 감정을 자극해 분노하게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단어의 선택이 그래서 중요하다.


오늘 한겨레신문 오피니언면에 실린 언어학자 로버트 파우저가 쓴 '사회의 언어' 칼럼에 "언어적 장식으로 전락한 '자유' '민주주의'"에서도 같은 단어를 놓고 진영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을 지적하고 있어 흥미로움을 더했다. 이 칼럼에는 "윤대통령의 미국 의회 연설문에 등장했던 프리덤(freedom)과 또 다른 자유 리버티(liberty)의 차이를 비교해 논 내용이 있다. 프리덤은 '개인의 의지대로 행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리버티는 '개인의 의지대로 행위하는데 억압받지 않을 권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미국 헌법 전문에 리버티는 나오지만 프리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건국이념에서는 절대적인 자유보다는 공동체 사회의 상대적 자유를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윤대통령 연설문에 등장하는 프리덤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했다"며 "보편적 가치에 관한 이야기인지, 한국과 미국이 공유하는 프리덤에 관한 지적인지, 아니면 다른 특정한 나라에 대한 지적인지 알기 어려웠다"라고 지적했다.


프리덤과 리버티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다. 우리는 두 영어 단어를 모두 자유라는 단어로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영어에는 두 개였던 것이다. 말과 글도 선택이다. 어떤 것을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게 되고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힌다. 세상을 보는 눈은 말과 글에서 시작되고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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