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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15. 2023

보이는 것은 만들어진 허상이다

동물이 외부 자극을 인지하는 감각은 다섯 가지가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다. 이중 시각, 청각, 촉각은 물리적 자극을 인지하고 후각과 미각은 화학적 자극을 받아들인다. 포유동물부터는 이들 감각기관 중 시각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브레인에서 감각영역의 60% 정도를 할당하고 있다. 같은 척추동물이지만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후각이 더 발달해 있다. 당연하다. 물속에 녹아있는 냄새분자를 인지하는 기관이 발달해야 생존에 유리할 것임은 자명하다. 물속에서 시각을 발달시켜 봐야 물의 깊이와 탁도의 한계로 멀리 볼 수가 없다. 진화는 명백하다. 환경에 적응한 증거로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다'라는 시각적 행위를 한번 들여다보자. 


물을 떠나 육지로 올라오고 나무에서 내려온 포유동물로 오면서, 시각은 지배적인 감각기관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시각만큼 황당한 감각기관도 없다. 빛이 없다면, 아니 태양이 없다면 시각 중추는 필요 없다. 아니 태양빛이 지구의 생명을 만들었으니 모든 생명의 시작은 빛이다. 눈은 빛을 받아들여 형태와 색을 감지한다. 내 존재 밖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창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각 감각은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미지는 허상이다. 시각 이미지는 두개골에 갇혀 외부세계를 직접 보지 못하는 브레인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이미지에 언어를 붙여 기억을 폭발적으로 늘린 것은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각이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는 증거는 눈 감아보면 안다. 눈 감으면 방금 눈앞에 전개되었던 풍경이라 할지라도 금방 사라져 버린다. 지금 눈 감은 바깥의 이미지를 불러오려고 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감으면, 바깥 풍경을 브레인이 예전 기억을 재조합해 만들어낼 뿐 똑같은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다. 반면 청각은 어떤가? 청각은 리듬을 저장한다. 지난밤에 들었던 노래의 리듬을 아침 출근길에 흥얼거리기도 한다.


시각은 단지 행동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기에 그렇다. 

피식자로 진화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이다. 보는 순간 피하고 도망가거나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얼어붙어야 한다. 피식자의 숙명이다. 피하고 도망가는 것은 즉각적이다. 멈칫거리거나 망설이면 안 된다.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피하고 도망간 후에 뒤돌아보니 길가에 서있는 나무였네라고 할지라도 생명은 구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라고 외면하고 회피했는데  그것이 호랑이고 늑대였다면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렇게 무심한 유전자를 가진 선조들은 이미 모두 잡아먹혔기에 지금 생존해 있는 존재들은 즉각적으로 도망가고 숨었던 선조들의 후예들이다. 회피는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다. '본다는 행위'는 이렇게 엄정하다. 즉각적으로 움직임을 유발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획 짓는 선이다.


그래서 본다는 행위에 온갖 형이상학적 의미가 달라붙어 있다. 행위의 동사 중에 '보다'만큼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단어도 없다. '본다'는 동사의 기본형은 눈으로 인식하는 행위의 표현일 뿐이지만 생각하거나 평가하는 것, 읽거나 살펴보는 것, 관람하고 감상하는 것을 비롯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까지 수많은 행위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도 '본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니 사물을 바라볼 것이 아니다. 나의 행동을 시작하게 하는 단초이니 눈 똑바로 뜨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잘 보고 많이 봐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예측가능성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고 생존 기회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안구정화를 위해 대자연을 만나는 일조차,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자명해졌다. 


보이는 것이 다 가 아님도 염두에 둬야 한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이 현상이다. 보이는 장면은 하나이지만 보이는 장면은 사람마다 각기 달리 보이고 달리 받아들인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모습을 보는 시각이 이럴지언대, 각자의 생각과 관점으로 범벅이 된 이미지를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식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각자의 보는 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것, 내가 틀릴 수 도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다. 그것이 본다는 것의 정의이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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