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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16. 2023

개는 개일뿐, 의인화의 착각

의인화도 창작이고 창의적인 생각일까?


의인화(擬人化, personification)는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으로, 무인격적인 대상에 인간적 특성을 부여하는 표현법이다.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식물이 잘 자라더라", "코끼리가 그림을 그리더라"를 비롯하여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북한산 토르(Tor)에 사자바위, 거북바위, 촛대바위의 명칭을 부여해 부르는 것도 수인화지만 의인화 표현 확장의 일종이다.


의인화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기막힌 방법이기에 비전문가들을 현혹시키기에 딱 맞는 수법이다. 비유이기에 과학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깔고 있다. 현상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하다 보니 가장 쉽게 들이대는 표현방법이 의인화다.


"사람 같다"는데 더 이상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사람 같다"라고 의인화해 버리면 무궁무진한 스토리가 따라붙을 수 있다. 개가 주인인 줄 안다거나 고양이 집사를 자처한다. 


간단히 의인화에 속고 있는 사례를 한번 들어보자.


"과수원의 나무들에게 잔잔한 클래식음악을 매일 들려주면 나무도 잘 자라고 과일도 풍성하게 잘 열릴까?"라는 질문이다. 이 사례는 가끔 TV에서도 볼 수 있는 진풍경 중의 하나로 실제로 과수원에 스피커를 달아놓고 음악을 틀어주는 장면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식물들도 음악의 음률에 반응을 할까?

과학적으로 보면 택도 없는 소리다. 과학적 사고로 들먹이면 아는 체하는 것 같고 거부감이 있을 듯 하니, 보는 시각을 집합론적 사고, 위계적 사고로 바꿔 들이대보자.


소리를 인지하는 복잡한 경로를 다 무시하고도 소리를 인지하고 듣는다는 것은 신경세포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식물에도 소리를 인지할 수 있는 청각 신경세포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답은 간단하다. 식물은 소리를 듣는 신경세포가 없다. 식물은 소리를 듣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들에게 아무리 음악을 들려줘봐야 꽝이다.


이런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의인화 현상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그럴 것이다' '그럴 수 도 있지'라는 관용 속에 용인되고 믿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직관적 현상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거짓'을 더 유용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편안한 거짓'의 전형이 의인화하는 방법이다. 사람 같다고 하면 의심하거나 따질 필요가 없다. 내가 해봤으니까, 내가 직접 경험했고 봤고 만져봤고 냄새 맡아봤는데 거짓일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오라고 하면 오고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고 오른손 하면 오른손 내미니, 사람하고 똑같다고 해도 믿을만해진다. 오히려 사람이 '개만도 못한 놈'으로 욕먹는 경우로까지 증폭되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은 식물이고 개는 개고 고양이는 고양이다. 각각의 모습으로 환경에 진화했고 각각의 모습으로 지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체를 봐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면 훨씬 더 귀여워지고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의인화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이 의인화는 그래서 말도 안 되지만 유효하게 작동하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가끔은 현상보다는 본질도 들여다보는 관점의 전환도 필요하다. 본질을 알고 있으면 현상이 아무리 변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상만 보면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현상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본질을 알고 나면 현상은 허무해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유효한 현상은 인간 군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아 스토리를 남기고 신화를 만들어 존속시켜 왔다. 인간에게 있어 스토리의 서사(敍事)는 생각과 행동의 힘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주말이다. 혹시 가까운 산에라도 등산을 간다면 발밑의 흙과 멀리 올려다보이는 바위들이 어떤 조성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물어보자. 등산로를 초록의 잎으로 그늘지게 만드는 저 나무들은 어떻게 땅 속의 물들을 잎의 끝까지 끌어올리는지 물어보자. 학교졸업하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면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본질은 현상 이면에 항상 있는 것이기에, 묻는다는 행위는 애매모호함을 명확하게 만드는 스승이다. 의인화가 애매모호함을 강화하는 가면이라면 이젠 벗어던져야 할 때도 됐다. 너무 오랫동안 속아 왔으면 화가 날 때도 됐을 텐데 속아왔는지도 모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다.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의 대서사가 아름답다는 것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의인화로 물든 자연이 아니라 본래의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이 진정한 미의 찬미이자 추구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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