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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19. 2023

문과와 이과의 차이, 애매함과 명료함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있다고 치자. 누구의 문제일까? 공부 못하는 학생의 책임일까? 성적이 오르도록 가르치지 못한 선생님의 잘못일까? 일단 시비 걸릴 수 있으니 양쪽이 다 문제가 있다고 양비론으로 들이대보자.


학생은 일단 공부하기 싫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휴대폰에 널려있고 컴퓨터 게임 속에 있는데 지루하게 문제나 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질풍노도의 가슴떨림이 이성의 체취에 실려오는데 방구석과 도서실 책상머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싫고 더구나 공부하라는 말 듣기는 더욱 싫다. 그렇게 공부에 흥미는 더욱 사라지고 감각적 흥분을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발산하는 것이 더 짜릿한 시기다.


공부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은 수만 가지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미적분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표가 없으니 도전할 마음도 없고 왜 하는지 모르니 신이 날리 없다.


세상 대부분 일이 그렇긴 하지만 공부는 특히 자기가 하고 싶어야 한다.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선생님들은 학생이 공부가 하고 싶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물가로 가도록 유도만 해주면 된다. 물을 마실지 말지는 당사자에게 맡겨 알아서 하도록 하면 된다. 물속에 빠트려 강제로 물을 먹게 할 수 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책임소재를 따져 부담을 질 수 있다. 자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물에 빠트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핑계를 대는 구실을 제공한다. 물론 연령대와 학년에 따른 수준에 맞춰 적당히 물맛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정답이 없다. 애매모호함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 공부인데 그 과정도 역시 애매모호하다.


사실 학생의 애매모호함을 명확하게 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책임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에 학생이 헷갈려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학생의 수준에 맞춰 공부의 길을 이끌고 가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공부에 흥미를 못 갖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선생님의 명확한 설명이나 이끎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 70% 이상이 수학을 포기하는 현실은 수학을 왜 배우는지, 배우면 삶에 어떤 이로운 점이 있는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 풀이식에만 매달려 있으니 미적분을 왜 배우는 지조차 모른다. 사인, 코사인, 탄젠트 용어가 왜 쓰이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조차 모른다. 선생님도 모르니 학생이 알리가 없다.


왜 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기를 강요받는다. 철학이나 인문과 달리 수학 공식은 아무리 외워도 나중에 그 의미가 떠오르거나 되살아나지 않는다. 인문과 수학과 물리법칙은 존재 이유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학에서 쓰이는 수많은 기호와 부호들은 그렇게 쓰자고 합의된 것이다. 인과를 담고 있을 뿐 의미를 물을 수 없다. 방정식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되지 않는 이유다. 수학에는 인간관계에서 묻는 의미를 물을 필요가 없다. 인과에 의해 정답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수학에는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는 이분법만 존재한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애매함이 수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과의 극명한 차이다. 

인문에서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정답이면 오히려 곤란한 경우가 인문이다. 사실은 하나지만 진실은 하나가 아닌 경우가 있다. 인문에서는 애매함이 오히려 미덕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규정지어 놓으면 편을 가르는 형국이 된다. 편이 갈라지면 바로 적과 아군으로 구분된다. 인문에서 회색지대란 그만큼 어려운 영역이다. 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은 변절로 규정된다. 주체성도 없다고 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바뀌는 것이 인문의 모습이다.


수학은 연산을 통해 예측을 한다. 정답이 나오고 정답이 나오면 반드시 예측값도 맞아떨어진다. 달에 아르테미스 우주선을 보내고 누리호를 보내는 것도 수학을 통해 나온 계산값으로 인해 가능하다. 달에 토끼가 산다는 인문으로 바라봐서는 우주선을 10미터도 공중으로 못 올린다.


물론 인문(humanitas)이 사람사이의 관계를 다루니 삶을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리처드 파인만이 말한 '거만한 바보'로 인문학자들이 전락해서는 안된다. 리처드 파인만은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들이 아주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그들과 얘기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쩔 수 없다. 정직한 바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직하지 않은 바보는 골칫거리다. 나는 토론회에서 거만한 바보들을 무더기로 만났고 아주 낭패했다. 다시는 토론회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거만한 바보'를 최근 유시민 작가가 쓴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통해서 다시 인용했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태양과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은 또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중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군상의 관계만을 따지는 인문이 얼마나 비대칭한 지를 꼬집어 빗내고 있다. 그렇다고 인문을 마냥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닿지 않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인문이기에 과학을 바탕으로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문을 한다. 역시 유시민 작가는 글쟁이는 글쟁이다. 항상 한 발 앞서간다. 지식을 섭렵하는 스펀지 같다. 부러운 능력이다. 뼛속까지 인문인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의 방향을 먼저 치고 나간 혜안에 존경을 표한다. "바보를 겨우 면한 자의 무모한 도전"이라는 책의 후기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고백과 진배없다. 인문 위에 과학이 설 자리는 없지만 과학의 바탕 위에 인문은 설 수 있다. 그래야 한다. 과학 위에 인문이 서야 뜬 구름이 아닌 실제 인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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