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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0. 2023

기억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기억나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문장도 '잊지 말자'는 단어에 방점이 찍혀있다. 결국 기억(記憶, memory)이다. 기억은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는 것"이다. '되살려 생각해 내는 것'이 기억의 핵심이다.


동물적 본능도 DNA에 각인된 기억이고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도 기억에서 시작된다. 루틴 하게 행하는 모든 습관조차 기억의 반복학습으로 인해 체계화된 행위일 뿐이다. 기억력이 좋다 나쁘다가, 머리가 좋고 나쁨의 바로미터로 활용되기도 한다.


기억이 서사(敍事)를 만들기 때문이다. 서사는 순서를 갖는다. 기억에 순서가 없으면 뒤죽박죽 말하게 되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앞뒤를 조리 있게 잘 엮어내야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전달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은 인출이 생명이다. 기억의 저장창고를 적재적소에 잘 열어서 가장 적당하고 가장 합리적인 것들을 끄집어내어 연결하는 것이 기억의 인출이다. 그렇다고 기억의 인출이 동영상처럼 재생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인출은 재구성된다. 기억의 단초는 문장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사전(lexicon)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인출할 때는 단어를 떠올리고 중간중간 삽입되는 연결문구는 단어의 뜻과 가장 맞을만한 것을 붙여서 문장으로 만든다. 


이 기억의 인출과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알츠하이머다. 알츠하이머병은 뇌에 베타 아밀로이드 플라그와 타우 단백질이 축적되어 건강한 뇌 세포가 파괴되고 뇌 부피가 감소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기억상실, 인지 기능 저하 및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진행성 장애다. 파킨슨병은 뇌의 흑질 영역에서 도파민을 생성하는 뉴런의 손실로 발생하는 것으로 떨림, 경직과 같은 운동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알츠하이머는 기억의 저장창고를 하나씩 파괴하고 연결을 끊어내어 기억을 석화시킨다. 알츠하이머는 머릿속의 메두사다. 기억이 서서히 석화되면 실 생활에서도 하나씩 잃는 것이 생긴다. 기억의 석화속도와 현실에서 기억의 상실로 잊혀 가는 속도는 비례한다. 기억 하나하나는 은행에 저금해 놓은 현금과 같다. 언제든 인출하여 쓸 수 있으면 내 돈이지만 꺼내쓸 수 없으면 내 돈이 아니다. 꺼내 쓰기도 전에 은행 잔고에서 사라져 버리는 현금이 있다면 현실에서는 은행을 바꾸거나 다른 계좌로 이체를 하면 되겠지만 기억의 은행서랍은 교체가 안된다. 한번 저장을 하면 영원히 그 계좌에 넣어놓고 반복해서 꺼내 써야 하는데 반복해서 꺼내는 인출에 문제가 생기면 은행이 파산하는 것과 같아진다. 어떻게든 기억의 계좌 동결을 막아야 하고, 안되면 늦추기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환자는 자기가 기억을 잃어가는지를 자각할 수 없다. 간혹 건망증으로 인해 깜박깜박하고 약속을 까먹는다거나 자동차를 지하주차장 어디쯤에 주차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어 화들짝 자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시적 현상은 알츠하이머라 하지 않는다. 알츠하이머 병은 주변인들에게는 안타깝고 속 터지는 일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행복한 망각일 수 있다. 


기억을 잃어감에 따라 자기 자신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현상이지만, 잃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잃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눈을 마주하고 보고 있으면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흐릿한 눈망울만 있을 뿐이다. 기억이 빠져나간 눈에는 총기도 함께 빠져나간 것이다.


'기억의 뇌과학'이라는 책의 저저인 신경학박사인 리사 제노바(Lisa Genova)는 "우리는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85세의 당신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시라. 어떤 모습일까? 85세 노인들 중에서 둘의 하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있다. 당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돌보는 보호자로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알츠하이머가 퇴행성 질환이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나고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을 준다.


맞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억의 숲을 잘 가꾸는 일 말이다. 잘 가꾸어 시들거나 말라가는 기억이 없는지 되짚어보고 회상해봐야 한다. 기억의 숲이 다시 풍성해지고 색깔도 다시 살아나도록 단장을 해야 한다. 공부를 해서 기억의 창고를 다시 만들면 된다. 이미 만들어진 기억이 희미해진다면 새로운 숲을 만들고 그 숲에서 나는 나무들로 창고를 채울 일이다. 혹한의 겨울이 와도 그 땔감으로 온기가 살아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기억을 만드는 일에도 비장함이 있어야 한다. 무기력한 기억은 빼버리고 확고한 확신과 생명력을 가진 기억의 단어들로 채워 넣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장검에는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 ;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문구가 각인되어 있다. 이렇게 기억은 머릿속에 각인하는 일이다. 그래야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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