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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2. 2023

배롱나무꽃 보기 위해 출근길 경로를 바꾸다

아침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하여 전철역으로 갑니다. 조금 뭉그적거렸더니 전철이 플랫폼에 들어올 시간이 초읽기에 들어간듯하여 초조하게 잰걸음을 걷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철역 입구에 도착하니 전철 머리가 멀리 모습을 보입니다. 일단 뛰어 플랫폼으로 내려갑니다. 간신히 열린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갑니다.


전철에 몸을 싣으니 땀이 살짝 배어납니다. 등에 걸머진 백팩의 무게도 느껴집니다. 통로 확보를 위해 백팩을 오른쪽 어깨 쪽으로 돌려 매 앞쪽으로 당깁니다. 덕분에 등 쪽으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두 정거장을 지났을까요?


갑자기 '배롱나무'가 보고 싶어 집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꽃나무입니다. 왜 가만히 서 있다가 '배롱나무'가 화들짝 머릿속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발화점이 작동했을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어떤 붉은색이 배롱나무의 꽃 색깔과 일치했을까요? 그렇다고 왜 지금 이 시간에 배롱나무꽃이 떠올랐을까요?


배롱나무꽃이 떠오르는 순간, 다음 전철역인 회기역에서 부랴부랴 내렸습니다. 보통은 경의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을 지나 왕십리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시청역까지 오는 경로를 주로 이용합니다. 회기역에서는 1호선으로 환승을 할 수 있고 역시 시청역까지 올 수 있습니다. 오늘 회기역에서 내린 이유는 1호선 시청역에서 플랫폼을 올라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덕수궁 대한문 바로 앞으로 올라오기 위해섭니다. 좌측으로 시청 광장의 아침 풍경이 보이고 대한문 앞 월대 공사가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가림막을 걷어낸 모습도 보입니다. 비에 젖은 아침 풍광이 더 운치 있는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입니다.


덕수궁 담벼락을 끼고 걸으면 왼편으로 시립미술관과 시청 서소문 제1청사가 있습니다. 출근길은 시청 제1청사 정원을 가로질러 건너옵니다. 그 정원 양쪽 끝에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철역을 올라와 덕수궁 돌담길 초입에 들어서면서 약간의 초조함과 긴장감이 엄습합니다. 배롱나무에 과연 꽃이 피었을까? 피었으면 얼마나 많이 피었을까? 아니 꽃 필 때가 되기는 된 건가? 지난겨울에 얼어 죽지는 않았겠지? 등등 연인을 만나러 가는 심정의 부질없는 상상력이 총동원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시선은 배롱나무가 있는 위치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붉은색 배롱나무꽃이 보입니다. "아! 잘 있었구나. 올여름도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있구나" 반가움으로 맞이합니다.


배롱나무에 다가서 봅니다. 아직 꽃이 만개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햇살을 많이 받는 나무 꼭대기의 꽃들부터 피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요즘 계속 비가 내려 비의 무게를 꽃잎들이 버티고 있느라 축 쳐져있습니다. 꽃잎마다 밤새 내린 비가 이슬처럼 맺혀있습니다. 선분홍빛 붉은색의 꽃잎들이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칙칙한 이 아침의 분위기를 들떠 일으키기에는 아직 꽃잎들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배롱나무 꽃들은 이제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배롱나무꽃은 여름꽃입니다. 7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월 가을까지 100일 가까이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국화과의 백일홍과는 전혀 다른 꽃입니다. 오히려 배롱나무꽃은 태평양 휴양지 섬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일명 불꽃나무(flame tree)로 불리는 로열 포인시아나(royal poinciana)와 비슷한 듯합니다.


덕수궁 돌담길 옆 배롱나무와 조우하고 발걸음을 회사 쪽 입구에 심어진 또 다른 배롱나무로 향합니다. 어차피 회사로 가는 길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 배롱나무는 꽃을 피울 기세가 전혀 없습니다. 같은 정원에 식재되어 있는데도 이렇게 꽃을 피우는 시간에도 차이를 보입니다. 나무의 연륜과도 관계가 있을까요? 이쪽 나무는 몸통도 가늘고 하긴 합니다. 그래도 오히려 안심이 됩니다. 이제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으니 더 오래 꽃 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근길 발걸음을 돌아오게 만든 배롱나무 덕분에 아침 걷기 운동도 조금 더 했습니다. 체력 증강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건강의 복원력이 더 큰 위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가끔 출근길을 바꿔 걷다 보면 기억 속에 숨어있던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출근길은 시간이 정해진 구간을 걷는 것이라 가장 빠른 경로로 세팅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퇴근길은 여기저기 들러 돌아갈 수 있어도 출근길은 보통 정해진 길을 반복해서 오고 갑니다. 그렇더라도 회사까지 오는 여러 경로를 가지고 있으면 그 길마다, 계절마다, 날씨마다, 새로움을 만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이커리의 빵 굽는 냄새가 유혹하는 길도 있고 창문 활짝 열린 키오스크 커피숍에서 풍겨오는 진한 커피 향이 발길을 붙잡기도 하고, 오늘처럼 돌담길과 비에 젖은 정원을 가로질러 걸으면 나리꽃과 맥문동꽃도 보입니다.


힐링? 별거 아닙니다. 일상을 잠시 놓아놓는 일입니다. 출근길 루틴 하나만 바꾸고 5분만 더 천천히 걸으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예전에 안 보이던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오감의 감각이 예민해야 합니다. 알아채야 합니다. 내게 말을 거는 생명의 숨소리를 말입니다. 배롱나무꽃의 선홍빛 색깔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배롱나무 꽃에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라는 꽃말이 붙어있어서 그런가요? 여름 내내 피어있을 배롱나무꽃을 살며시 만져보고 출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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